‘거슨내’ 주변에 몰도왓 돌방아가 있었다고 하는데, 본격적인 마을 형성을 위한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김〇차(1932생)의 구술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마을에 회의가 있을 때면 물도왓 사람들이 신흥 2리로 와서 마을 회의에 참여했고, 해방 전에는 물도왓 사람
신흥리 물도왓화전은 물도왓은 신흥리 2327번지에서 남쪽으로 2289번지까지 이어지던 화전마을이었다. 세종대왕 1430년 쌓은 하잣담이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동쪽에 마을 식수원인 ‘거슨내’가 흐르고 있다. 거슨내를 솔내(松川)라고도 부른다. 인근 무덤 비석에는 ‘물도
붉은오름 남서쪽 가시리 3795번지 화전은 지금 숲이 우거졌는데, 일제강점기엔 풀밭에 접해 있었다. 이곳의 동쪽 약 50m 거리엔 돌담 집터와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마당 흔적과 산전 울담이 주변에 남아있다. 양하가 자라고 있어 과거에 사람이 거주했던 곳임을 알려준다.
남원읍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현승민)가 올해부터 분과별로 관내 17개 마을을 탐방해 마을의 소식과 애로를 청취하기로 했다. 지난 11일에 교육문과분과(분과장 양인호)가 의귀리를 첫 번째 마을로 정해 방문했다. 분과위원들은 마을회관에서 오철호 이장을 만나 마을에 대해
그동안 민간에서 감기에 걸리거나 기가 허한 환자에게 당유자를 달여 마시게 했다. 그렇게 당유자는 민간의 사랑을 받으며 종을 유지했는데, 최근에는 당유자의 가치를 확인할만한 자료가 발표됐다. 감귤연구소는 지난 2021년 12월에 『대학나무 감귤』(현재욱 외 13인)을 발
당유자는 오래전부터 제주섬에 자생하는 귤 품종이다. 당유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나온다. 충암 김정은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에 연루돼 금산에 유배됐다가 이듬해 제주도로 이배됐다. 충암은 제주도의 풍토가 궁금하다는 조
가시리는 하잣 위로 물찻오름 인근까지 목장과 산림을 이루고 있다. 물찻오름은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잣담이 서로 경계를 이루는 만큼 가시리 목장과 산림은 드넓다. 화전민들은 드넓은 목장과 산림을 무대로 여러 곳에서 목장화전과 산간화전을 일구며 삶을 영위했다. 이 가운데 녹
남영호는 1970년 12월 15일 1시 25분경 전남 여수시 남면 연도(당시 주소로는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남남동쪽 25km(13.7마일) 지점에서 파도에 부딪쳐 복원력을 잃고 침몰했다.사고 후 12월 26일 법무부장관 배영호가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남영
난 당유자를 사랑한다. 당유자는 시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이 섬에서 자생했는데, 몇 차례의 기후변화에도 여태 잘 살아남았다. 특별한 농약도 없었고 수탈에서 벗어나려고 백성이 귤나무를 죽이는 일도 있었지만, 당유자만은 농가의 마당에서 잘도 버텼다.▲ 동홍동
진펭이굴 화전은 지금 사이프러스골프장 4홀과 6홀 사이 냇가 일원에 있던 마을이다. 진펭이굴의 설촌에 대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일제강점기까지 10여 호의 주민이 살다가 1945년 해방될 때 3가구가 남아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도와 1948년 항공사
예전엔 집집이 일력이 있었다. 집에 걸어두고 날짜에 맞춰 매일 한 장씩 뜯어내며 날이 가는 것을 확인했다. 일력에 날짜와 요일 말고도 음력날짜와 물때 24절기 등 필요한 정보를 담았으니, 일력이 있어야 절기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일력이 다시 주목을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다. 성산포항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화물은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는데도, 성산포항에서 화물과 승객을 더 실었다. 사고가 뻔히 예견되는 상황인데도 사무장 강O근의 위세에 눌려 선장은
앞서 화전지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제주 화전이 어느 특정한 고지나 경관 지역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음을 명칭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그 구분에 정확한 기준은 없는 실정이다.
색달동 냇서왓은 1948년 항공사진에선 40채 내외의 집들이 보인다. 이로 본다면 냇서왓은 위쪽 모라이오름 ‘빌레흘’ 화전민들이 이주해 살았을 가능성이 있고, 인구가 자연적으로 증가하고 자녀가 분가하는 과정에서 집이 늘어났을 수도 있다. 냇서왓 출신 김〇열은 제주4·3
앞선 기사에서 남영호 선장 강ㅇ수가 1970년 12월 14일, 서귀포항에서 배에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하도록 실은 선원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배가 그날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도 승객과 화물을 더 실었다. 바닷물이 갑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