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세와 마장세에 반발, 방성칠 지휘 아래 수만 명 관아로 집결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⑥] 제1차 제주민란
19세기 자연재해와 노비해방으로 생계 어렵고
지방관 횡포를 피해 이주하는 사람 전국적으로 증가
목장지대와 그 위로 화전촌 형성
화전세와 목장세에 반발해 제1차 제주민란 발생

19세기 중엽에 만주로 들어가 간도 땅을 개척하는 조선인 수가 크게 증가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화전민이 목장이나 산간으로 이주해 화전을 일구는 시기는, 한반도 북부에서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만주 땅을 일구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 조세 문제로 관아와 화전민 사이에 늘 긴장으로 이어졌다. 지방관이나 아전이 횡포를 부리는 날이면, 화전민들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사진은 제주목관아 입구다. 제1차 제주민란 당시 백성들은 제주성 입구에서 이병휘 목사와 만나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들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사진=장태욱)


이흥권이 2017년 강원대학교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19세기~20세기 초 조선의 만주 이주민 정책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만주로 이주하는 현상과, 여기에서 발생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 국경분쟁을 다루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은 인적이 드물고 경계가 불분명한 광활한 지대가 존재한다. 19세기 초부터 이 지역으로 조선인 이주가 시작됐는데, 중기부터는 이주자 수가 급증했다. 186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조선 북부에 큰 재해가 발생하기도 했고,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다 굶어 죽는 일도 많았다. 조선인들은 처벌을 무릅쓰고 두만강·압록강 연안을 건너 만주땅에 집을 짓고 땅을 일궜는데,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조선인은 자신이 개간한 토지를 청나라 사람들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청나라 사람의 소작농이 되거나, 토지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 귀하해야 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기근이 발생하고, 집권세력의 무능이 삼정문란을 불러왔다. 백성은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돌아야 했다.

조선조정은 1801년(순조 1), 궁궐과 관청에 속한 공노비 6만6000여 명을 해방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사노비들을 추가로 해방했다. 신분제가 붕괴하면서 제주에서는 땅을 찾아 중산간 목장지 위로 이주하는 이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 1899년 작성된 제주지도. 목장지대와 그 위에 화전민촌이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자료다.(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10년까지 제주도 화전민은 급격히 증가했다.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목장 화전마을은 숙전(熟田)지가 되면서 정주(定住)형 화전마을로 성장했다. 이런 사실은 고지도(古地圖)에서도 확인된다.

1899년에 발간된 제주지도에는 대병악, 소병악 인근에 화전촌들이 보인다. 올리튼물, 몰통도, 거머흘과 같은 목장화전촌이 있다. 또, 천서악(모라리오름)과 녹하지오름 주변에도 화전촌이 있는데, 상문리, 빌레흘, 모른궤가 당시부터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그런 와중에 화전민에 대한 과중한 세수가 지방관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민란으로 이어졌다.

앞서 기사에서 1862년 발생한 임술 제주민란에 대해 전했다. 화전민에 대한 과다한 세금이 민란의 직접적 계기가 됐고, 화전민 강제검이 이끄는 반란군이 제주성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리고 1898년에는 ‘방성칠의 난’이라로 불리는 제1차 제주민란이 발생했다.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병휘(李秉輝)의 탐욕이 극심했고, 방성철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시정을 요구하다 여의치 않자 반란으로 확산됐다. 당시에도 지방관리의 탐욕과 세금이 문제였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은 을미사변(1895년)의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로 1898년 제주에 유배됐다. 그는 1865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기를 썼는데, 1887년 이후의 일기를 엮은 게 속음청사((續陰晴史)다.


속음청사에는 그가 4년 남짓 제주도에서 머물던 시절의 일기도 들어있어서, 제1․2차 제주민란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제주문화원이 발간한 국역 속음청사
속음청사 1898년 2월 8일 기록에는 ‘촌민 수백 명이 관가에 들어왔는데 장두인 방(房) 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화전세 및 마장세의 지나친 징수, 호포의 지나친 징수, 환곡을 관에서 마음대로 조정하는 폐단을 소청하니까 제주목사 이병휘가 일일이 들어주고 따르겠다고 하여, 백성이 모두 해산했다’라 했다.

탐욕스런 관리는 백성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의 분노가 끓기 시작했다. 3월 1일 기사에 ‘민당(民黨) 수 만 명이 성 밖에 모였는데 장두는 방성칠’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방성칠에 대해 ‘전남 화순군 사람으로 몇 년 전에 섬에 들어왔는데, 신체가 장대하고 담력이 있으며 술수를 좋아해 80세 노인이나 아이들이 모두 이인(異人)이라 칭한다’라고 했다. 그른 실제로 가족과 함께 제주섬에 들어와 아라동 화전인 민밭에 정착한 화전민이었다.

김윤식의 기록으로는 방성칠이 화전민 수백 명을 뽑아 친군을 삼아 치밀하게 호위하게 하고 삼군에서 모인 백성을 엄하게 단속하고 호령했다. 당시 제주섬에 유배됐던 최영순과 김낙영을 좌우대장으로 삼고 심복인 정산마와 강벽곡 등 수백명에게 칼과 총을 나눠주고 제주와 대정, 정의 삼군을 장악했다. 제주섬이 방성칠의 천하기 됐다.

하지만 정의현감 홍재진(洪在晉) 등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송두옥이 이끄는 제주성 창의군과 힘을 모아 방성칠 등 지도부가 제주성을 비운 사이에 성을 장악했다. 방성칠은 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다시 화전촌으로 돌아갔다.

방성칠은 결국 창의군의 반격으로 애월읍 파군봉 밑에서 피살됐고, 창의소는 도망쳤던 이병위 목사를 도로 맞았다. 1898년 3월 15일의 일인데, 이에 대해 김윤식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애월읍 하귀리 파군봉, 김윤식의 기록에는 방성칠이 여기에서 창의군에 피살됐다.


‘방역을 죽인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이번 민란은 모두가 전 목사의 탐학한 소치에서 비롯됐으므로 만약 다시 전 목사로서 일을 보게 하면 백성은 반드시 시끄럽게 다시 동요할 것이니 새 목사가 도임하는 것을 기다려 여러 사무를 정돈하는 것이 좋겠다.’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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