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화전민 봉기하자 제주목사는 무서워 도망쳤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⑤] 화전민이 주도한 임술 제주민란

화전세 불만으로 출발
1, 2차 봉기에 임헌대 목사 시정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아
3차 봉기 불길 확산, 임 목사는 화북포구로 도망치고
조정에서 베테랑 무관 정기원 파견하고 겨우 진압

▲ 무등이왓 중퉁굴. 임술년 제주민란을 주도했던 강제검은 안덕면 무등이왓 출신 화전민이다.(사진=한상봉)

18세기 말부터 제주관아는 재정은 빈약해졌다. 관아는 19세기에 들어서자 화전에 대해 세금에 부과됐다. 화전세는 정해진 세율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일반적으로 지방관 결정으로 세금을 정했는데 세금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화전민은 난의 중심에 서게 된다.

1862년 9월 6일 대정현 덕수리에 거주하는 화전민 김석란은 금년도 화전세가 터무니없이 높이 책정됐다는 내용으로 통문을 보내면서 임술년 제주민란에 불이 붙었다. 그해 총 세 차례의 봉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중심에는 화전민이 있었다.

1차 봉기는 9월 12일 일어났는데, 조만송(趙萬松)과 장환(張煥)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제주성으로 몰려가 향리들이 뇌물로 받아 둔 명주·포목·남초 등 재물과 화전세 수세 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향리들을 붙잡아 구타했으며, 답험감관(踏驗監官, 공마․진상․마필조사의 업무를 맡은 자)과 향리의 집을 부쉈다.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화전세를 다시 조사하고 모든 폐해를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발표하고 나서야, 봉기군은 자진 해산했다.

그런데 임헌대 목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강제검(姜悌儉)과 현재득(玄才得)이 중심이 되어 10월 6일 2차 봉기를 일으켰다. 강제검은 안덕면 동광의 무등이왓 출신 화전민이다. 1만여 명에 이르는 봉기민은 제주목 장교와 백성을 괴롭히던 아전 5명을 직접 처형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제주 목사에게서 아전들을 법에 따라 처형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또 자진 해산했다.


▲ 제주목 연희각. 제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이다.(사진=장태욱)

그런데 임헌대 목사는 약속을 이행하는 대신 봉기 참가자들을 잡아들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성난 민중이 다시 봉기를 했으니 11월 15일 시작된 3차 봉기다. 강제검의 지휘 아래 김흥채(金興彩)·박흥열(朴興悅)·조만송 등이 중심에 섰다. 봉기민 수만 명은 제주읍성 밖에서 아전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운 후 제주읍성을 장악했다. 겁에 질린 임헌대 목사는 제주 화북포(禾北浦)로 피신했다가 11월 25일에야 돌아왔다. 여차하면 배를 타고 섬을 뜰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봉기민은 각종 민폐 시정에 착수했고 장부를 조사했으며, 민폐시정규칙을 완성했다. 12월 9일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봉기군이 제주읍성을 지배하는 해방의 시기가 됐다. 봉기군이 행정을 직접 집행했고, 제주목 관속 5명을 처형하기도 했다.

조정은 제주의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임헌대 목사를 파직하고 정기원(鄭岐源)을 제주방어사로 파견했다. 정기원이 부임하자 강제검은 민폐시정규칙의 실행을 요구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강제검이 다시 거사를 준비하며 통문을 돌리는 사이, 정기원은 강제검을 포함한 주동자의 처소를 급습해 이들을 체포하고 민란을 수습했다.

제주 선비 김석익 선생이 1915년 편찬한 탐라기년(耽羅紀年)에는 고종 때 문신이었던 고성겸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전에 세를 매는 일은 의례 그해 농사의 풍겸에 따른다. 왕왕 소요가 일어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에 괴로운데도 하소연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혹 어리석은 이가 한번 외치면 그림처럼 이에 향응하여 바로 수 만인이 된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고성겸은 제주출신으로 성균관 교수에 선발될 정도로 지방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다. 유림의 눈에도 괴로운 화전민이 하소연할 곳이 없었고, 한번 성이 나면 수만 명이 금새 모일 정도로 반란의 기운이 끓어 넘치던 시기였다.


▲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 관문이었던 화북포구. 성난 민중이 봉기하자 임헌대 목사는 화북포구로 피신했다.(사진=장태욱)


▲ 화북동 비석거리. 이곳에 임헌대 목사 선정비가 남아 있는 것은 역사의 코메디다.(사진=장태욱)

철종실록에는 1862년(철종 13) 12월 29일 전 제주 목사 임헌대가 백성들의 소란을 치계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임헌대는 파면 후에 조정에 민란에 관한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지방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난을 수습하지도 못했으며 변란을 피해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구차하기 그지없는 지방관이었다. 그는 결국 이듬해 4월 평안도 초산부로 귀양 보내졌다.

그런데 화북포구 입구 비석거리에는 임헌대 목사 선정비가 남아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변란 가운데도 화북포로 도망했던 목사의 선정비가 이곳에 있다니, 우스운 일이다.

철종실록에는 정기원 및 강제검과 관련한 기사도 나온다. 1863년(철종 14)에 제주 방어사 정기원이 난민(亂民)의 괴수인 강제검 등을 효수(梟首)해 대중을 경계시켰다고 보고했다는 내용이다.

정기원은 1863년 2월에 강제검과 김흥채를 효수하고, 다른 봉기 가담자 30여 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1863년 4월 안핵사 이건필(李建弼)이 도착하자 체포자 30명에 대한 처벌도 이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관리 측 16명, 강제검·김흥채 등 봉기 가담자 22명이 효수를 받거나 정배됐다.

고종실록 1864년(고종 1년) 8월 30일 기사에는 임술년 제주민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아뢰기를, "연전에 제주(濟州) 백성들이 소란을 피운 사건은 먼 바다 밖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무마하여 안정시키기가 육지에 비해 비교적 어려웠을 것인데, 전 목사(前 牧使) 정기원(鄭岐源)은 임기응변을 잘해 탁월히 장수의 지략을 보여주었으며 뒤처리를 잘해 훌륭한 수령(守令)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런 특이한 인물은 응당 장려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니 가자(加資, 특별승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했다.

정기원이 수습하기 어려웠던 제주민란을 탁월한 지략으로 수습했기에, 사건이 1년도 더 지난 시점에 그의 직급을 특별히 올리자는 제안이다.

김석익도 탐라기년에 정기원에 대해 기록하기를 ‘청렴하고 정직하여 위엄이 있었다’라며 ‘세율을 바르게 하고 평역미를 줄이고 금전으로 헤아려 정해 백성들을 그의 덕을 칭송했다’라고 했다.

정기원은 이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와 충청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어사 등을 두루 거친 무관이었다. 임술민란은 현직 제주목사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포구로 도망을 갔고, 조정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전장의 지휘관을 파견하고서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물론 임술년 민란이 진압됐다고,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수탈은 끊이지 않았고, 화전민 등 벼랑 끝에 몰린 민초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모순이었는데, 그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19세기 말 제주섬에는 ‘방성칠의 난’이라고 불리는 제1차 제주민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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