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전 5가구 화전이 김무성 부친·장영자 거쳐 세월호 관련 회사에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⑫] 성읍 2리 ‘안팥화전’

앞서 화전지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제주 화전이 어느 특정한 고지나 경관 지역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음을 명칭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그 구분에 정확한 기준은 없는 실정이다. 목장이나 산림지가 개간되어 정주(定住)화된 마을이 형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남동 ‘서치모르’는 기존 위쪽에 있던 화전민들이 모여들며 정주화된 후 마을로까지 성장했으며 이러한 곳에는 돌방아, 우물, 올레와 거릿질, 살레왓 등이 주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치모르’뿐만 아니라 ‘무등이왓’, ‘생물도’ 등은 마을 훈장을 두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큰 화전 마을로 성장했다. 단순한 화전마을로만 볼 수도 없게 돼, 화전을 구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호한 단계까지 이르기도 했다.


제주 해안가의 마을들도 아주 먼 옛날에는 이러한 성격을 띠다 인구가 늘어나며 마을이 커지고 올레와 거릿질이 만들어진 경우이니, 화전의 성장과 그 모습이 닮아있다 할 것이다. 이처럼 제주 중산간 위쪽으로도 정주화 된 마을이 등장하여 중산간 마을처럼 변화해 갔으나, 제주4·3의 화마를 만나 그 수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정주마을로 성장하지 못한 지역의 화전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웃 화전마을로 이주하거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했다. 또, 일제의 조림과 관련한 정책으로 산간지역에서 쫓겨난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는 뒤로 하고 세종대왕 시기인 1430년 만들어진 하잣담을 기준으로 그 위쪽 목장과 산간지역의 화전민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살았는지 살펴보고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조사한 화전마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옮겨보고자 한다.


▲ 항공사진에 나타난 성읍 2리 '안팥화전'


  성읍리 ‘안밭’

성읍리 하잣 위로는 두 군데의 목장 화전지가 있었다. 한 곳은 ‘안밭’이며 다른 한 곳은 ‘진펭이’라 불렸던 화전터이다. 두 지역에 대한 역사서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제주4·3 이전에 사람이 살았고, 제주4.3 당시에 소개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8년 발행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 1948년 항공사진, 『제주4·3유적』등에 두 화전터가 잘 나타난다.


1918년 제주지형도에는 ‘안밭’에 10여 채의 집이 보이는 반면, 1948년 항공사진에도 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집이 보이고 있다. 또한, 백약이오름 인근에도 집이 있었던 걸로 확인된다. ‘안밭’의 중심지는 성읍리 2526번지, 1909번지 주변 1932번지 및 1922번지 일원이었다. 백약이오름 인근 1868번지와 2540번지 남쪽경계에도 군데군데 사람이 살았음이 항공사진에 나타난다. 그런데 제주4·3 이전엔 다섯 가구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주민 정만수, 정만석, 부영율, 부영전 씨 등이 있었음을 ‘진페기화전’ 출신 한〇율(1935생)은 증언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는 메밀, 조, 피를 재배하고 소를 키웠다고 한다.


▲ 위성사전에 나타난 안팥화전 일대

‘안밭’은 영주산의 서쪽 냇가 사이인 ‘옆구리잣도’를 통해 교류를 했으며, 일제강점기에 정 구장이라 하여 정주열 씨가 성읍 2리의 초대 이장을 1947년까지 맡기도 했다. 제주4·3 때 안밭 사람들은 성읍1리로 소개됐고 이후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마을은 사라졌다. 이후 이곳에는 축우단지가 들어섰다.


1960년대 후반 남제주군에서 축우단지를 만드는데 입주하는 사람 1인당 땅 4만5000평, 소 10∼20마리, 함석 집, 돈 150만원을 알선 융자하여 33호가 입주했다. 초기는 8가구였는데, 이들은  소를 돌봐주는 대가로 왕래하며 관리해주는 사람들이 먼저 들어 온 것이다. 이후 33가구가 추가로 들어와 단지가 완성됐다. 이주자들은 육지부 출신이 2가구였고, 나머지는 도내 출신으로 하천리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융자금 상환 시기가 되자 남제주군에서는 융자금 회수에 나섰다. 입주자들은 융자금 상황이 어려워져 남제주군은 전 입주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 공동으로 소를 팔게 됐다. 이로 인해 입주자들은 안밭 축우단지에서 떠나야만 했다.


돈을 받아내야 할 남제주군 측은 이 땅들을 배를 운영하는 재일교포 운수업체에 팔았는데, 단 제주도경찰국 제1과장 김〇〇 만은 땅을 팔지 않아 돈은 벌었다고 한다. 배 운수업을 했던 재일교포는 이 지역을 신한제분에 팔아버렸는데 사장은 김용주로 전 김무성 국회의원의 부친이다. 신한제분에서는 다시 장영자에게 팔고 지금은 청초밭영농조합에 팔리게 되며 지금에 이른다. 청초밭영농조합은 세월호를 소유했던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인이 설립한 종교단체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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