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85명이던 ‘생물도’ 화전민, 왜 사라졌을까?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⑧] 일제의 산림령으로 생활터전에서 내몰린 화전민들

갑오개혁 이후에도 제주목장은 10소장 자체가 폐장된 것이 아니라 운영되고 있었다. 10소장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화전민이 거주하며 각종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인이 남긴 기록으로 확인된다.


▲ 상문리 화전민 터(사진=한상봉)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여세를 몰아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하고 외국인 고문이 재정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에 따라 제주에도 1905년 기마야 카쿠오(神谷卓男) 재무관이 파견되었다. 그는 1906년 조사한 『제주도 현황일반』(우당도서관이 ‘구한말 제주도일반형황’이라는 제목으로 편역본을 냈다.)에 장감(場監)과 마서기(馬書記)의 역할을 기록했으며 장세(場稅)와 공마대전(貢馬代錢)을 거두어 이방에게 넘기는 역할을 하고 있음도 상부에 보고했다.

『제주도현황일반』에는 장세(場稅)와 공마대전(貢馬代錢)을 7, 8, 9소장과 산장에서 여타 목장에 비해 많아 부과하고 있음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 목장세와 공마대전을 내야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의미한다. 7, 8, 9소장에 화전민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과 일치하고 있다.

장세는 목장을 개간‧경작한 것에 대한 징수 세금이고, 공마대전은 경작자에게 부과하는 추가 세금이었다. 이외 낙마세(烙馬稅)도 있었는데, 상민이 판매차 출륙할 때 말에 낙인하는 일종의 말 수출세였다. 관유지 목장을 경작하는 자에게만 부과했는데, 산골에 사는 사람들만 내는 세금이었다. 장세와 공마대전, 낙마세는 다른 지방에는 없고, 오직 제주도에만 있는 세금이었다.


▲ 서홍동 생물도 화전민터(사진=한상봉)

『제주도 현황일반』의 내용이다.

‘섬의 인구가 증가함에 또한 연안 생활이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도민들은 산 근처로 이주해 경작지를 만들었다. 만약 촌민들이 남벌남소(濫伐濫燒)하는 것을 그대로 방했다면, 한라산은 민둥산이 되기까지 1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나서서 주의를 환기하자 요즈음 겨우 한 조각의 금지령을 발표했을 뿐이다.’

남벌 금지령을 발표했다는 것은 화전민들을 단속했다는 얘기다.

1900년대 초 상문리의 상황을 살펴보자. 1904년 만들어진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總册)』에는 상문리에 대해 ‘웃중문의 연가는 29호이다. 남자 35명과 여자 25명을 합하여 70명이고 초가는 70칸이다’(上門, 煙家二十九戶, 男三十五口 女三十五口,合七十口, 草家七十間)라 하고 있다.

일본인이 1920년대에 작성한 『제주도개세(濟州島槪勢)』의 내용을 보면 상문리 주민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과거 30-40년 정도까지는 노간지(老幹枝)가 섞여 나무가 빽빽하게 울창하게 산림이었던 곳을 화전민이 닥치는 대로 불태워 메일, 조, 피, 밭벼와 같은 작물을 2~3년 경작하고는 이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 화전 경작을 하는 것은 현지의 산간지대에 검게 그을린 큰 나무의 잔해 또는 그루터기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충분히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앞의 화전 지대에 접한 부분 및 경작지대와 접한 부분에 돌담을 쌓아 풀어 놓은 우마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

상문리 주민들이 화전을 일구면서, 주변에 돌담을 쌓고 말과 소도 키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6년도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한반도의 식민지화 차원에서 필요한 자료에 대해 선제적으로 지역 상황을 파악해두려고 했다. 이렇게 파악된 자료들은 기반으로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왕실이 소유 산림이나 공유림을 국유화했다. 그리고 산림령을 내려 벌목을 금지하고 화전 개간에 관한 규정을 두고, 1916년엔 구체적 규제 방법까지 시행된다. 1920년대 육지부에선 화전이 늘었는데, 제주도에선 화전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 1918년 지도에 서홍동 생물도 화전민 집이 몇 채 남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육지부가 늦게 종료된 것과 관련이 있다. 육지부에서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농민은 소작인이 되거나 화전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 중 일부는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제주도에선 산림령으로 화전 경작이 어려워졌는데 일본에 일자리가 생기자, 제주도민은 일본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제주에서의 화전민 감소 사항은 서홍동 추억의 숲길 인근 ‘생물도’의 화전민 호족초(戶籍草)에서도 확인된다. 필자가 분석한 호적초를 보면 건양원년(1895년) ‘생물도’ 총 인구수는 85명이는데, 아내가 없는 이도 보이며 나이가 2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했다. 2년 후인 1897년에는 22호 75명, 1898년은 방성칠의 난으로 인해 기록이 없다. 1900년에는 7호 33명, 1905년에는 7호 34명으로 거주인이 줄고 있다. 사람들이 생물도를 떠나고 있음이 보인다. 1918년 「조선오만분일」 제주 지형도엔 4채로 더 줄고 인근 '서귀포 시민 치유의 숲'에 2채의 집이 보일 뿐이다. 살기 위해 어디론가 이주를 한 것이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