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인구 줄어들더니 제주4·3 과정에서 55% 사망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56) 영남동 화전민(6)
1914년 지적원도를 보면, 영남동 서치모르에는 웃마을 27가구가 살았고, 아랫마을에는 모두 34가구가 확인된다. 영남동에 살았던 몇 개 집안을 추적했는데, 앞선 가사에서 강임준, 이보겸 집안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러 집안을 추가로 소개한다.

■ 김정생
김정생(1912)은 서치모르 출신으로 친부는 김동호의 집안이다. 용흥리에 사는 고영부(1943생)가 아들이다. 제주4‧3 희생자 명단에 보이는 김신생(金辛生. 당시 17살)은 김정생의 동생이거나 사촌으로 보인다.
김정생은 제주4‧3이 발발하기 전에 용흥리로 시집을 갔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고영부는 모친이 생전에 판관화전으로 올라가 밭을 일구었다 진술했다. 그리고 모친은 판관화전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누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고영부는 1950년대에 생활이 어려워 하원동 광대코지 사격장에서 실탄을 주워다 용흥리 장 중사(육지 출신. 약초도 취급)란 사람에게 팔기도 했다고 한다. 인동고장(=인동꽃)도 따다 말려 팔았는데 한라산 기슭에 도벌했던 자리에 인동꽃이 많이 피었다 한다.
제주4‧3 이후 가난하던 시절 김동호는 한라산으로 올라 궤 안에서 잠을 자면서 도벌(몰래 나무를 베어냄)도 하고 뱀도 잡았다. 도벌로 가져온 나무로 쉐로 밭을 갈 때 쓰는 성애나 잠대를 만들기도 했다. 17∼19살 때의 일로 선배들과 함께 했다.
도벌할 때는 한라산에 올라 나무를 자른 후 깎아서 집으로 가져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산감(山監)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무를 숨겼다. 나무 도벌 외에도 약초도 캐고 뱀도 잡았다.
한라산 기슭을 돌아다니다 보면 뱀을 잡는 요령이 생겼다. 도벌했던 자리에 햇볕이 들면 뱀들이 몰려왔다. 가을이나 가뭄이 들 때는 물가에 가면 뱀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뱀을 잡을 땐 왕대로 쪼갠 집게를 만들었고, 경우에 따라서 나무를 Y자로 만들어 사용했다. 독사는 살며시 발로 밟고 나뭇가지로 머리를 눌러 깡통에 넣었다고 한다. 뱀 잡이는 돈벌이가 좋았으며 많이 잡을 땐 30∼40마리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이 시기가 19∼20살이었으니, 1962∼63년의 일이다.
1960년대 초반엔 고구마 전분 공장이 운영되면서 고구마 재배를 시작했다. 뱀을 잡는 일은 그때 그만뒀다. 밀주시를 먹던 시절 배고픈 고비를 뱀 잡이를 통해 넘긴 경우다.
■이자춘
이자춘(李自春.1887생)은 후손이 법환리로 이주해 살았다. 후손 이문익(1966생)은 이자춘이 자신의 증조부라고 증언했다. 이자춘이 살았던 곳은 지적원도에 영남리 224번지였는데, 지금의 번지로는 영남동 223-4번지 일원이다. 법정사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수형인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 제주4‧3 당시 이자춘은 61세의 나이로 학살됐다.
■백사훈
백사훈은 『잃어버린마을을 찾아서』에서 그 이름이 확인된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백사훈은 모간(목안=제주읍) ‘세궤양(한두기 부근)’에서 영남리 서치모르로 들어왔다. 1914년 지적원도에 백 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토지조사 사업 이전에 어디론가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 그 외
제주4·3 과정에서 희생된 이름과 번지가 확인되는 집안이 있다.
원성춘의 이름은 1914년도 지원적도에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볼 때 원성춘은 일제강점기에 잠시 들어왔다가 어디로 이주했을 것이다. 제주4‧3 이전에 어디론가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두칠은 제주4·3 과정에서 사망한 김두행(240번지. 57세)의 일족이다. 친형제거나 사촌 형제로 보인다. 57세에 사망했다. 당시 5살이던 딸도 사망했다.
김병일은 김창훈의 선대로 보인다. 영남동 248번지에 인척 김창헌과 이웃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필권(文必權)은 1914년 지적원도에 보인다. 1881년생으로 67세에 사망했다. 영남리 280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박경생(朴庚生. 1910생.당시 38세)은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했던 박경흡의 동생으로 보인다. 당시 지적원도에는 박 씨 집이 영남리 2831번지 한 군데밖에 없어 박경흠과 형제로 추정된다. 제주4·3 때 3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봐서 영남동 안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오영이(吳榮二. 당시 34세)는 1914년 이후 영남동으로 들어와 살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1914년 원적도에 오 씨 집안이 없는 것으로 봐서 1914년 이후에 아내 이봉(李鳳) 등 가족과 함께 영남동으로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4.3유적- 서귀포』 영남리 편에는 3살 딸 오정무, 1살 아들 오종부와 함께 무장대에 끌려가 행방불명됐다고 기록됐다.

영남동은 1800년대 중후반에서 서당이 있을 정도로 융성한 마을이었다. 1914년 서치모르 34가구, 코뻬기 화전 3가구, 판관 화전 6가구 등 43호에 이르렀다. 1948년 마을이 불타기 전까지 인구가 점차 줄어들어 16호, 92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됐다.
이는 제주 해안도로의 개설, 일본으로의 진출, 상업경제의 대두 등 사회적 환경변화가 이어져 해안지역으로 이주하는 흐름이 있었다. 판관화전과 코뻬기화전처럼 규모가 작은 화전 사람들이 먼저 이주했고 이후 영남동 중심마을도 규모가 점점 줄어들었다.
영남동은 제주시, 신엄리, 도외, 사계리 등 각지에서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 마스다 이치지는 『제주도의 지리적연구 : 2005』에서 영남동이 호근리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기술했다. 미스다 이치지의 기술은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 옛 「남제주군지」 등에는 그가 남긴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1948년 16호 92명 중 제주4‧3으로 희생된 사람은 51명이었다. 주민 전체의 55%가 사망했고 나머지는 타지로 이주해 흩어졌다. 현재 영남동 마을에는 육지부에서 온 전 씨 가족과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후손 고 씨 가족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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