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화전촌→오사카, 제주도 디아스포라와 화전의 성쇠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⑨] 살려고 화전 일군 사람들, 일제강점기엔 일본행

남원읍 신례리 마을 산간에 이생이오름(이승악)이 있는데, 1918년 지형도에는 오름 북동쪽에 여러 화전민의 집이 보인다. 이곳에 살던 김씨 집안은 신례리 2170번지 화전 터에 대한 세금을 지금도 내는데, 토지세가 2500원이라고 했다. 선대의 가계도를 보니 한경면 신도리에 묘가 있으며, 선대가 신도리에서 넘어와 살았다고 한다.


▲ 1918년 작성된 5만분의 1 지형도. 이생이오름 주변에 화전민의 집이 보인다.


이생이오름(이승악) 뒤에 살던 김씨들이 한남리 ‘머체왓’에 땅을 사두었다 이주해 한남리 김씨 집안이 됐다. 이들은 제주4‧3 당시 ‘머체왓’ 화전에서 한남리로 이주를 했다. 이외도 이생이오름 뒤편엔 박씨 집안도 있어 신례리 주민이 잔치 때 갔다 온 일도 있으며, 이곳 화전에서 태어난 박〇〇은 물을 길어 오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역시 4·3사건에 하효동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상문리에서 1947년까지 살았던 중문동 김〇〇(1935생)은 부친과 조부 시절에 민머르오름 앞에 이주해 와 살다가 상문리로 이주할 때 나무로 목기를 만들고 담배를 재배하고 이후 메밀, 감자 등을 재배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화전 지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도외(道外), 목안(제주시) 등 화전지에서 거리가 먼 곳에서 이주해 왔음이 보인다. 일본인 마수다 이지치의 『제주도의 지리학적 연구』에서 인근 아랫마을에서 이주했다는 밝힌 것과는 상이함을 보이고 있다.


▲ 수망리 장구못화전터(사진=한상봉)


마수다는 그의 글에서 감산리에서 파생된 마을이 상천리(모록밭), 천서동(냇서왓)이라 했으며, 서홍리의 고모 씨와 그 일족에 의해 생수동(생물도), 같은 마을 김씨 일족이 응장동(연제골)을 만들었다 했다. 또, 평대진전(벵듸왓)은 상효리 오씨 일족이 수악동은 신례리를 모촌(母村)으로 해 김씨 및 정씨 등이, 수망리 묵지(먹고흔모르)는 한남리의 이씨, 고씨 일족이 일궜다고 밝혔다.


그는 가까운 해안이나 중산간 마을에서 사람들이 올라와 화전촌을 만들었다 주장했지만, 필자가 조사한 결과, 화전마을을 일군 사람들은 거리가 먼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1982년 발간된 『남제주군지(南濟州郡誌)』에는 일본인 마수다의 주장을 그대로 실렸는데, 연구자들이 잘못된 자료로 인해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으로 군수품을 수출해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이 호황을 기반으로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제주도민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화전지역도 사회경제적으로 급속한 변화를 맞았다.


▲ 머체왓화전 집터 흔적(사진=한상봉)

화전민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일본인의 글이 있다. 일본인 미즈키 도라오(水成寅雄)는 「탐라만필」에서 “명치 44년(1911) 경까지는 소위 화전경작을 인정하고 있었고, 당시는 상당수의 화전민이 산재해 있었다.”라거나 “장작 같은 것도 직접 등에 지고 가는 남녀를 나는 종종 산길에서 목격했다. 산상(山上) 부락의 화전민은 최근에 아주 줄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삵궹이의 털모자를 쓰고 개가죽으로 짠 외투를 입고 있다고 들었다.”라 했다. 『제주도개세(濟州島槪勢)』에서는 “산간 부락 쪽은 땅이 척박하고, 음료수의 관계로 인구가 희박하고 신탄업(薪炭業)과 목축업을 겸하고 있다. 옛날에는 삼림에 불을 놓아 수목을 태워 그 자리에 메밀, 보리, 연초(담배) 등을 재배하며 생활하였다만 지금은 화전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낮은 땅에 고인 악수(惡水)를 음용하고 있는데 …”라 하여 이 책이 나온 1928년 이전엔 이미 화전을 막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일본인 마수다 이지치(枡田一二)는 일본으로 출가(出家)한 사람은 도민의 25%인 5만53명이라 하고 있다. 당시 중산간 마을인 연동과 월평동은 전체 호수의 72%가 한 명 이상 일본으로 진출했으며, 동광리 72명, 영남동 ‘서치모르’도 16명이 진출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참고로, 1918년 일본총독부가 제작한 「조선오만분일」 제주지형도에 보이는 화전 중 1948년 4‧3사건 직전까지 사라진 목장 위의 화전촌은 다음과 같다.

교래리 개남술, 고영듸, 길영동, 시안모르화전, 오등동 춘선도, 남열밭, 진페이지슴, 능화동, 오라동 김별장화전, 열안지오름 고목수집터, 어음리 홍골화전, 봉성리 공초왓, 한대비케화전, 고영백화전, 광평리 돌오름밭화전, 상천리 어오름밭화전, 색달리 빌레흘, 중문동 상문리(한 가구만 존재), 모른궤, 윤못화전, 하원동 너른도(양유서 집 한 채 존재), 도순동 구머흘화전, 왕하리화전, 코빼기화전, 판관화전, 서호동 가시왓케, 총각산전, 서홍동 생물도, 동홍동 연제골, 하례리 벵듸왓, 위미리 감낭굴, 한남리 고냉이된밭화전, 엄실이화전, 수망리 먹모르화전, 싱비물화전, 비지굴화전, 가시리 영아동화전, 너븐담골화전 등.


가시리 해남굴, 상효동 기전모르 화전이나 사두석 화전처럼 조선시대 생성되었다 1918년 이전에 사라진 화전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여러 화전 지역이 인근 화전마을로 통합되기도 했고, 주민이 해안마을이나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소멸의 길을 걸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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