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벌대에 쫓기다 죽고, 살아남아 낭장시·숯장시 해봤지만 결국‥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⑩] 제주4·3에 사라진 화전마을

일제는 1918년 <임야 조사령>을 공포하고, 이를 바탕으로 1919년에는 임야정리조사를 실시했다. 1921년엔 관변단체 ‘조선산림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합 수는 전국적으로 1344개였는데 조합은 산림보호, 조림, 이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 무등이왓. 제주도에서 4.3의 피해가 가장 컸던 화전마을이다.(사진=한상봉)

이후 산림회 조직은 마을 단위에서 면, 군 단위로 확대되었는데, 면장은 당연히 산림조합장이 되었고 부조합장은 면장이 천거하며, 평의원을 두었다. 이런 뒤 군(郡) 단위에도 조합을 구성했다. 1925년엔 제주도 산림조합을 구성했다. 1922년 아라동 현 국립공원 경계에 10ha의 인공조림을 실시하여 주로 소나무 등을 조림하고 12월에는 임야소유별 경계를 확정했다. 당시 총 공사유별 산림면적은 8만2951정보(1정보=1ha)였다. 『하원동지』에는 1922년 조림이 처음 실시됐으며 해발 500m 이상 지역에 조림이 되고 있다고 기록됐다. 일제가 이들 정책을 시행하던 시기는 제주 화전민이 사라지거나 아래 중심화전 마을로 옮겨가는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1925년엔 산감(山監)이 설치되고, 1926년엔 산림보호를 관장하는 영림서(營林署)가 제주에 설치되었다. 이어 1927년 산림단속과 관련해 산림주사(山林主事)와 순시원을 배치(산감)하였으며 이들에게는 사법권이 부여돼 산림 훼손 현행범 체포 및 수사가 가능해졌다. 1928년 발간된 『제주도개세』에는 ‘임야보호규칙’이 ‘제주도령으로 실시돼 도벌과 폭벌(暴伐)을 제거했다’라고 기록됐다.


이러한 연이은 일제의 산림정책으로 기존 산림 안에 정착했던 화전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났고 일본으로의 이동과 같은 사회적 변화와 맞물리며 소멸하는 과정을 밟았다. 제주도민은 1920년대 후반부터 급속하게 일본으로 진출했는데, 현지에서 노동운동과 학업을 거쳐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새롭게 형성된 지식인층은 해방 이후 제주4‧3의 발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5년 해방 이후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혼란 속에도 무등이왓, 삼밧구석, 서치모르(영남동), 올리튼물, 멍끌마을, 솔도, 조가외, 냇서왓, 물도왓, 머체왓, 장구못, 장터마을, 종남굴, 궤뜨르, 물터진골, 원동 등 일부 목장 화전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들 마을도 제주4‧3을 거치면서 화마를 피하지 못해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다. 언급한 화전은 『제주4·3보고서』에도 등장하는 마을로 특히, 무등이왓, 냇서왓, 장터마을, 궤뜨르, 물터진골, 원동은 목장 화전 중심마을이었기에 피해가 매우 컸다.


▲ 종남밭에 사람이 살던 흔적이다. 역시 제주4.3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이다.(사진=한상봉)


모른궤(솔도)마을과 멍끌마을은 20여 호가 있었는데, 주민들은 제주4·3 당시  토벌군이 쳐들어오자 인근 오름 ‘지혈궤’, ‘한대궤’에 숨었다 도망치던 도중 사살되거나 잡히기도 했다. 괴오름 기슭에선 40여 명이 잡혀 주정공장으로 넘겨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곳은 제주4·3 이후 복구마을로 지정이 되어 6가구를 시초로 거주가 시작됐다. 주민들은 팥, 지슬, 메밀, 콩, 피, 토종 밀을 재배했고, 겨울이면 ‘한대비케(한대오름 기슭을 이르는 지명)’에서 곶숯을 구워서 한림장까지 등짐으로 지고 가서 파는 ‘낭장시’, ‘숯장시’를 했다. 또, 여름이면 ‘부중(보리 베기가 끝난 뒤의 시기)’ 뒤에 해안마을에서 위탁 쉐(소)를 받아 키우는 사람도 있었는데 삯은 한 달 보리 몇 말로 정해졌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에 이들도 고향을 떠나 마을은 사라졌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전원생활을 하는 터로 바꿨다.


▲ 천서동. 제주4.3 이후 재건된 마을인데, 화전민은 모두 떠나고 없다.(사진=한상봉)

무등이왓과 삼밧구석 사람들은 제주4.3 당시 토벌이 시작되자 마을 주변 인근 목장이나 ‘앞작지’ 등 가시자왈에 숨어 있다가 ‘큰넓궤’로 이동해 궤에서 숨어 지냈다. 이후 토벌대에 존재가 알려지자 밤을 이용해 궤에서 나와 삼밧구석 사람들은 볼레오름으로, 무등이왓 사람들은 미(무)오름궤로 피신했는데, 결국은 발각돼 총살당하거나 끌려가 정방폭포에서 학살되었다. 무등이왓과 삼밧구석은 폐허가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고향 땅과 가까운 현 동광리에 모여 살게 되었다. 1950년 이후 무장대가 출몰하던 시기엔 경찰의 입회하에 고사리 꺾으러 갔고,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면 마을로 되돌아오곤 했다. 집 지을 나무나 장작이 모자라면 ‘돌오름밭’에 숨어들어 산감의 눈을 피해 나무를 베어다 모슬포장까지 지고가 팔았는데, 나무가 없는 마라도, 가파도 사람들이 주 고객이었다. 해안 여인들은 물질이라도 했지만, 중산간 여인들은 물질도 못하니 서울, 부산, 대구 등지의 방직공장으로 돈벌이 하러 가야 했으며 남자들은 일본으로 밀항자들이 많았다. 동광리 김〇〇여인은 25살까지 방직공장에서 수년간 일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가족에게 잡혀 시집을 가게 됐다며 웃기도 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