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으로 4일 체류, 선장 만류해도 객실·갑판까지 화물 가득

[기억의 재구성, 남영호 참사 ③] 1970년 12월 14일, 죽움을 부른 과적

남영호는 1970년 12월 9일 부산항을 출항해 서귀포항에 도착한 후 10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남해안에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서귀포에 체류하고 바다가 잠잠해지고 난 후에서 운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14일 오후 5시,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그리고 성산포에 기항해 승객과 화물을 추가로 싣고 부산을 향해 떠났다. 다음날 새벽 사고가 없었더라면, 남영호는 15일 아침에 부산항에 도착했을 것이다.


▲ 남영호 참사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유족들(사진=장태욱)

폭풍이 지난 바다는 무척 잔잔했다. 4일간 배가 항구에 묶여있었기에, 배를 타려는 승객으로 부두가 북적거렸다. 게다가 감귤 출하성수기에 연말 대목까지 앞두고 있어서 감귤을 실으려는 유통업자들도 트럭을 타고 길게 줄을 섰다.

당시 남영호에 승객을 태우고 화무를 선적하는 일은 삼우운수의 몫이었다. 남영상선주식회사 대표 강ㅇ진은 남영호 운항 사업을 하기 위해 서귀포에 ‘삼우운수’를 설립했다. 삼우운수는 남영호 승선자에게 탐승권을 발권하고, 남영호에 실을 화물을 집하하고 선적하는 일을 했다.

삼우운수는 남영호가 서귀포에 체류하는 기간, 계속해서 화물을 실었다. 배는 수익을 위해 3등객실도 하창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창과 3등객실은 물론이고 후부 상갑판에도 화물을 실었다.

배가 출항하는 날에도 화물이 계속 들어왔다. 법무부 발표로는, 이미 화물이 적정량을 훨씬 초과한 상황인데도 삼우운수 직원들의 지휘 하에 인부 20명이 화물 적재가 금지된 상갑판에까지 집을 실었다. 당시 선장 강ㅇ수는 화물이 갑판에 계속 실리는 것을 제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주들은 계속 화물을 실어달라고 요청했고, 입장이 곤란해진 선장은 출항 전까지 화주들의 눈을 피해 시내 모처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 남영호 침몰사고 희생자 유족들이 바다에 꽃을 뿌리며 희생자를 위로하는 장면.(사진=장태욱)

그런데 출항 직전에 배로 돌아와 보니, 삼우운수 직원들이 이미 선장이 선적을 허락하지 않은 화물까지 모두 실어놓은 상태였다. 남영호의 적재 중량은 130톤인데, 당시 실린 화물은 534톤이었다. 그중 밀감상자가 1만632상자, 잡곡 34가마, 채소 4트럭 분 등이었다.

강 선장은 선박 사무장 강ㅇ근과 항해사 오ㅇ원 등을 불러 “배가 출항할 수 없다. 너희들이 정신이 있는 놈들이냐”라며 “밀감상자를 모두 내리라”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자 사무장과 항해사는 “시간이 다 됐으니 가보자”라며 “여기서 짐을 내리면 화주들이 '누구 짐은 싣고 누구 건 내리냐'라며 항의할 것이다”라며 짐을 내리는 건 어렵다고 했다.

결국 강 선장은 위험을 감수하고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출항할 때 배에는 승객 157명과 선원 19명 등 176명이 승선했다고 신고했다. 그런데 사고가 난 뒤 가족의 신고로 36명이 추가로 승선한 것으로 추정됐다.

한때 서귀포항에 수상파출소에 근무했던 한 아무개는 “당시 화물 적재는 해운항만청이 소관이고, 승객의 승선은 경찰 소관이었다”라며 “경찰은 화물 적재가 위험한 상태인 줄 인지해도 사실상 권한 밖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승선자 명단이 정확하지 않은 것도 수상파출소 경찰의 임무가 승선자 명단을 확인하는 것보다, 수상한 자를 확인하는 일에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승선자 가운데 혹시 현상수배범이나 간첩이 숨어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미성년자 등의 명단을 정확하게 기록했는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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