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때 천주교인들 화전(火田)에 숨어 목숨 부지했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⑦] 제1차 제주민란

1700년도 초반 경작할 토지를 찾아 목장에 들어오기 시작한 화전민들은 1800년대 들어서자 관영목장 밖으로 이동해 터를 잡았다. 목장세 부과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10소장 안에서는 목장경작세를 내야 했지만, 10소장 상잣 위 지역으로 이동하면 목장세를 피할 수 있었다. 화전이 상잣 위로 확산했다.


▲ 생물도 화전촌(사진=한상봉)

제주시 지역은 상잣을 기준으로 위쪽에, 서귀포시는 속칭 ‘중원이케’라 불리는 지역에 화전민촌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생물도, 연자골, 장구못, 냇서왓, 천망동, 조가외, 올리튼물, 영남동, 너른도 등이 모두 그런 과정에서 설촌된 화전마을이다.

그런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민초들의 생활환경이 요동쳤다. 갑오개혁 당시 일본은 조선정부에 궁무와 내무를 분리하는 정책을 강요했다. 그동안 왕이 국가의 모든 재정을 관장했는데, 이를 분리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처음에는 일제의 요구에 고종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과거 왕실의 재원이 정부 재정에 이속됐다.

하지만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반격이 시작됐다. 갑오개혁 과정에서 국가에 귀속되었던 목장토․역토・둔토・목토 등 관유지의 상당 부분이 왕실 재정을 관장하던 궁내부로 이속됐다. 조세징수권과 홍삼전매사업 이익이 되는 사업을 왕실이 빼앗아 가면서, 왕실을 부유해지고 정부는 가난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빚어졌다.

고종은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하고 광무개혁을 단행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에 취임했다. 국가의 틀도 개혁하고 황제의 권한도 강화하려 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각 지방에 봉세관(封稅官 : 세금 징수관)을 파견해 세금을 걷어들였다. 이제 제주섬의 모든 생활영역이 과세 대상이 됐다.

김윤식은 속음청사에 광무개혁 이후 달라진 제주섬의 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개벽 이래로 본디 왕세도 없었고, 척박한 토지에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겨우 자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식이 자못 번상하여 백성들이 모두 즐겁게 살아왔는데, 지금에 이르러 형세가 전과 달라져 토지에 대해 정세(正稅)를 납부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백성들도 역시 알고 있어서, 반대하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봉세관의 횡포가 민심에 불을 지폈다. 방성칠의 난이 발생한 지 3년 만에 제주섬이 다시 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재수이 난’ 혹은 ‘신축민란’이라 불리는 제2차 제주민란이다.

1900년에 제주에 온 봉세관 강봉헌은 천주교인과 결탁해 섬사람들에게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

김윤식의 기록으로는, 강봉헌이 민전을 공토라고 협박해 빼앗기도 했고 인간의 칸수를 뒷간까지 세서 세금을 물렸다. 또, 어린나무는 물론이고 갈대와 잡초까지 수목세 물렸고, 소와 닭, 말에게까지 세금을 물려서 삼읍에 돈이 말라버릴 지경이라는 원성이 자자했다.

대정군수 채구석과 대정유림 오대헌이 상무사를 결성해 천주교인의 악행에 대항했고, 1901년에는 상무사에 백성들이 가세했다. 이재수와 강우백, 오대현 등이 민군을 지휘했는데, 삼읍에서 소식을 듣고 참여하는 자가 수만이었다. 수만의 백성이 제주성을 향해 진군하는 동안 백성들은 밥과 고기를 가져와 대접했다. 그 여세에 놀란 봉세관 강봉헌은 배를 타고 달아났고, 봉세관에 협조했던 천주교인들이 성을 지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해 5월 28일 민군이 제주성을 함락하고 천주교인에 대한 피의 복수를 단행했다.

프랑스 신부들은 뮈텔(Mutel) 주교를 통해 프랑스함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프랑스함대가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수백 명의 교인이 학살된 뒤였다. 조선정부도 군대를 보내 강봉헌·채구석·오대현·이재수 등 주동자들을 잡아들이고 백성을 해산했다. 이재수·강우백·오대현 등 주모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 수망리 장구못 화전터(사진=한상봉)

2차 제주민란(신축민란 혹은 이재수의 난)에는 앞선 임술 제주민란(강제검의 난)이나 제1차 제주민란(방성칠의 난)에서처럼 화전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흔적은 선명하지 않다. 애초 상무사를 조직한 채구석은 대정군수였고, 오대현은 대정 선비였다. 또, 민군을 지휘한 이재수는 본래 대정의 관노였는데, 오대현 휘하에 있었다.

오대현과 함께 동진을 이끌었던 강우백은 신축민란 이전에 4년 정도 월평리에 거주하면서 월평리 이강(里綱)을 맡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강제검에 난도 참여했는데,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게 많다.

민군이 제주성을 함락할 수 있게 성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남학과 기생 만성춘․만성월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앞선 방성칠의 난에도 참여했는데, 제주성이 함락되자 성문에 ‘봉세관의 폐’, ‘천주교의 폐’, 무술창의의 죄‘ 등을 내용을 방을 게시했다. '무술창의'는 방성칠의 난에 대항해 성 안에서 창의군을 결성한 일을 이르는 말이다.

천주교인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화전촌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 대정 천주교인 조〇〇은 형과 동생이 천주교인이란 이유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자,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하례리 ‘벵듸왓’ 화전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수망리 민오름 뒤 화전터로 이주했다. 지금 그의 가족 중 딸들이 수망리로 시집가 살다가 몇 해 전 사망했다.『대정읍지:1권』에 따르면, 상문리 화전민 중 김종필, 김권삼, 김철생 등은 천주교인이었다.

신축민란 당시 천주교인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을 만큼 도민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들어 간 곳이 민란의 화약고였던 화전촌이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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