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 침몰 직전 쥐가 먼저 내렸고, 따라 내린 사람도 있다

[기억의 재구성, 남영호 참사 ⑤]선장도 쥐도 예감한 사고, 결국 막지 못했다

앞선 기사에서 남영호 선장 강ㅇ수가 1970년 12월 14일, 서귀포항에서 배에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하도록 실은 선원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배가 그날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도 승객과 화물을 더 실었다. 바닷물이 갑판에 가까이 이를 정도로 배가 잠기자 강 선장은 출항을 거부하며 화물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사무장 강ㅇ근의 위세가 너무 셌던 터라 그날 저녁 7시55분경 출항하고 말았다. 배는 출항하고 네 시간 여 만에 파도에 뒤집혔고, 배에 타고 있던 300명 넘은 승객은 바다에서 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


▲ 배의 브릿지(사진=pixabay)

배의 안전에 최종 책임자였던 강ㅇ수 선장을 나름대로 배의 출항을 막고 대형 참사를 예망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고 후에 구조돼 생명은 부지했지만, 사고 후 징역형에 처해지고 면허까지 박탈되는 신세가 됐다.

강ㅇ수 선장은 1917년 생으로 1935년부터 선원생활을 시작했다. 선원으로 30여 년 경력을 쌓은 후 1967년 9월에 제주해운국에서 을종 2등항해사 면허를 취득했다. 을종2등항해사는 당시, 500톤 미만의 선박에서 항해사로 근무할 수 있는 자격이다. 강 선장은 면허의 등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선원으로 오랜 경력이 있었기에 1970년 12월 5일 남영호 선장에 발탁됐다. 그러니까 남영호 선장이 된 후 만 열흘 만에 대형 참사를 일으킨 책임자가 됐다.

강ㅇ수 선장이 배의 흘수선(배가 물에 잠긴 깊이를 나타내는 선)을 보고 위험성을 예상했데, 그 이전에 사고를 직감하고 하선한 승객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쥐가 배에서 내래는 것을 본 승객이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따라 내린 승객이 있다는 얘기다.


▲ 쥐는 로프를 따라 배에 오르내린다. 쥐의 이동을 막기 위해 배는 접안하면 쥐막이를 설치한다.




효돈동 주민 김정열(78) 씨는 “남영호가 서귀포츨 출항해 성산포에 가서 승객을 더 태웠는데, 배가 성산포에 대니 쥐가 내렸다고 하더라”라며 “성산포에서 어떤 승객이 배를 타려고 하다가 쥐가 내리는 걸 보고 잘 못됐다 싶어서 배를 타 않았는데, 그 사람은 살고 나머지 사람은 많이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에 그 소문이 파다했다”라고 말했다.

호근동 출신 오창림(61) 씨는 배에서 내린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오 씨는 “서호초등학교 동창생 중에 홍 아무개가 있는데, 어릴 때 그 친구의 어머니가 서귀포항에서 남영호를 타려다가 쥐가 내리는 걸 보고 따라 내렸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기자가 오창림 씨의 얘기를 듣고 홍 씨의 어머니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오래 전에 호근동을 떠나서 일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확인은 되지 않았다.

김정열 씨가 전한 소문의 주인공은 남자로 성산포에서 내렸다고 전하는 반면, 오창림 씨가 언급한 사람은 여자이고 서귀포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쥐가 배에서 내리는 장면을 통해 사고를 예감했다는 사람은 두 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쥐가 배를 타거나 배에서 내리는 건 보통 있는 일이다. 보통은 배를 부두에 붙들어 매는 로프가 보통은 쥐의 이동통로가 된다. 그래서 배가 항구에 접안하면 검역당국은 쥐가 배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로프에 쥐막이(rat guard)를 설치하도록 한다. 쥐를 통해 다른 나라로 전염병이 전파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쥐가 매우 영리한 동물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쥐가 눈치가 빨라 위험을 감지하고 사고를 예측해 먼저 배에서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쥐가 배에서 내리면 폭풍우가 온다’는 말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에 서귀포에 쥐를 따라 남영호에서 내려 목숨을 부지한 사람의 소문이 전하고 그 승객 가운데 한 명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목되는 것으로 보아, 쥐의 이동이 사람을 살린 건 실제 일어난 일로 보인다. 그게 사실이면, 쥐도 예상했고 선장도 예상했던 대 참사를 회사와 당국이 모른 채했다. 대목에 한몫 챙기겠다는 욕심에 눈이 가렸기 때문인데, 늘 참사 뒤에는 인간의 탐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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