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탈로 내몰린 화전민, 법정사에서 총과 몽둥이 들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⑨] 영남동, 위기에 처한 화전민의 거점이 되다
제주도 화전민은 일제가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1906년 이후 급속히 줄었다. 1911년에 산림령이 발효되고,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일주도로가 개설됐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15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이, 1918년에는 임야조사사업이 시행됐다. 일제가 추진한 이런 일련의 정책이 화전민의 생존을 위태롭게 했다.
그 와중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유럽은 전쟁터로 변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어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쟁으로 유럽에서 많은 공장이 파괴됐는데, 일본의 산업은 직접 전쟁의 피해를 받지는 않았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군수품을 연합국에 팔았는데, 그 과정에서 공업은 성장하고 인구는 도시로 집중됐다.
일본의 공업 발전으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인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시대 상황이 맞물려, 살기 어렵게 된 화전민이 살 곳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영남동 ‘서치모르’는 화전민이 유출하는 시대상황에서도 정주(定住) 화전지로서 별도로 행정동을 부여받은 특별한 사례로 남는다.
‘서치모르’도 화전 초기에는 상주인구가 많지 않았으나 마을보다 북쪽에 있던 화전민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확장됐다. 서치모르 주변에는 산간화전인 도순동 ‘구머흘’, ‘왕하리마을’, 영남동 ‘코빼기’, ‘판관’ 화전 등이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남원리가 중산간 마을인 수망리, 의귀리, 한남리, 여우내(신흥2리) 마을을 위성으로 거느리고 있는 형태와 닮았다. 이 위성 마을 주민이 남원으로 와 경제생활에 필요한 용품을 구입하는 것처럼 영남동 ‘서치모르’도 마을 위쪽에 자리한 산간화전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중심가가 됐을 것이다. 게다가 마을이 해안마을인 강정동이나 호근동과 연결돼 있어, 영남동 ‘서치모르’ 위의 화전 주민에게 교통과 경제의 중계 지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특수한 지리적 이점으로 마을이 번성했고, 다른 화전마을이 소멸했어도 영남동은 늦게까지 마을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산간화전인 ‘구머흘’은 도순동 산 1번지 내, 법정사항일운동 발상지에서 동쪽으로 300m~700m 거리에 산발적으로 분포했던 화전이다. 도순동 1364-1367번지와 1360번지, 1361번지 주변에 6채의 집 자리가 확인되는데, 현장에선 대나무와 깨진 그릇도 확인된다. 이곳에 ‘털보하르방’이라는 사람이 살았음이 도순마을 사람의 구술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털보하르방의 후손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조선오만분일」 제주지형도를 보면 ‘구머흘’ 화전 집터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 법정사항일운동과 관련한 『정구용 재심 판결문』에 언급된 도순(리) 상동인 ‘왕하리’ 화전 집은 표시되어 있다. 이로 본다면 현 지적도에 표시된 위 번지의 ‘구머흘’ 화전 사람들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5년과 지도 제작년도인 1918년 사이에 어디론가 이주한 것이다.
‘왕하리’ 화전은 ‘구머흘’ 화전보다 아래쪽에 있던 곳으로 법정사 무장 항일운동의 진출로에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2022년 발표한 논문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대각사상)에는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66인 중 문남은, 문남규 형제와 이종창, 김두삼, 이자춘 등이 이곳 화전마을 출신임이 확인됐다.
‘왕하리’ 화전에는 돌방아도 있는데 이곳엔 이종관(1866생), 이종창(1881생) 이종성(불명) 등 형제가 살았고, 인근에는 문남은, 문남규가 철탑 인근에 살다 ‘판관’ 화전으로 이주했고, 다시 영남동 ‘서치모르’로 이주했다. 그 이후 제주4‧3으로 집이 불타기 이틀 전 서호리로 이주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김두삼의 일가는 영남동으로 이주한 후 4‧3사건으로 사망했다.
영남동 488번지 ‘코빼기’라 불린 화전에는 제주4·3 당시 ‘어점이주둔소’가 위치했는데, 김씨와 이씨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김씨 집안은 제주시(목안)의 집이 불타자 ‘코빼기 화전’으로 이주했다. 그 후손이 용흥마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코빼기’ 화전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이씨 집안은 자신의 선대가 전남 해남에서 ‘코빼기’ 화전 터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판관’ 화전은 영남동 194번지 일원에 있던 마을로 영남동 ‘서치모르’에서 북동쪽 산록도로 너머에 있던 화전이다. 이곳 역시 1918년 지형도에 집 흔적이 없으나 1915년 토지조사사업에 지번이 부여됨을 볼 때, ‘구머흘’ 화전과 함께 1918년 이전 사라진 화전마을임을 알 수 있다.
영남동 ‘서치모르’ 화전민 이자춘도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했음이 보인다. 경주 이씨 집안 후손의 얘기에 의하면 ‘서치모르’로 이주하기 전 선대의 묘가 애월읍 금성리에 있다는 것으로 봐 이곳에서 이주해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법정사 무장항일투쟁은 1918년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 불교계가 중심이 되고 이 지역 화전민과 지역주민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총 3자루와 깃발, 몽둥이로 무장한 사람들은 ‘법정이내’ 동쪽의 법정사에서 ‘왕하리’, ‘코뻬기마을’, 영남동 ‘서치모르’ 화전마을을 지나 호근리와 도순, 하원, 중문리로 가며 400여 명의 동조자를 모집하고 중문주재소를 불태웠다. 하지만, 항일투쟁은 일본기마경찰에 의해 진압되고 검거된 사람들은 목포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무장항일운동은 5개월 후 일어난 비폭력적 3.1운동과 달리 스님이 주도하고 화전민과 지역 도민이 함께 자발적으로 일으킨 무장항일투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때 마지막으로 잡힌 강창규 스님은 상효리 화전민터에 숨어 살다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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