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때 벵듸왓으로 들어와 화전 일군 대정사람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㊱] 하례리 벵듸왓화전(2)

남원읍 하례리의 대표적 화전마을은 제1횡단도로 수악산 인근에 있던 벵듸왓화전이다. 1914년 지적원도에는 벵듸왓화전에 가옥 10채가 표시됐는데, 1918년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는 14채가 나온다. 4년 사이에 4채가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화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변했다. 다른 지역 화전은 제주4·3을 거치며 소실됐는데, 벵듸왓화전은 무슨 일인지 그 이전에 모두 사라졌다.

이치지(桝田一二)의 『濟州島의 지정학적 연구』에 실린 「제주도의 지리학적연구-제주도의 취락」 편을 보면 벵듸왓화전에 세 가구(1930-1938년 조사)가 있었다고 기술됐다. 1930년대에 화전마을이 대폭 축소됐다는 기록이다.


▲ 벵듸왓화전이 있던 곳.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예전이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주다.(사진=한상봉)
    
이즈미 세이치(泉靖一)가 1936∼1937년 제주에 머물며 기록한 책 『제주도 민속지』에는 1930년대 도내에서 인구 이동의 흐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책의 일 부분이다.

‘노인들의 말에 따라 이사 상황을 더듬어 본다면, 가장 심했던 우도의 경우는 예외로 하고 1900년경에서부터 약 15년간이었다고 한다. 이 사이에 고지(高地)의 촌락에서 저지(低地)로의 이동이 두드러졌다. (중략) 또, 이렇게 해서 사라진 부락도 있다. 심한 경우는 남쪽의 서귀면으로, 수악(水岳) 기슭에 산촌을 이루고 있던 평대진전(平垈陣田), 마찬가지로 산촌을 이루고 있던 생수동(生水洞)의 여러 부락은 거의 전부가 이사를 해버렸다고 한다.’

이즈미 세이치는 제주도 마을을 해촌과 양촌, 산촌 등으로 분류했다. 과거 농업이 중심이 되던 환경에서는 양촌의 지위가 가장 우위에 있고, 산촌, 해촌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00년대 이후 해산물의 판로가 늘어나면서 해촌의 지위가 상승했고, 그 결과 가족이 해촌을 향해 이동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평대진전은 벵듸왓의 한자식 표현이고, 생수동은 서홍동 생물도화전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경에는 벵듸왓화전과 생물도화전이 소멸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 효명사 주변 숲. 과거 이 일대에 화전민이 살았는데,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이주했다. 1960년대에 정부와 하례리 주민이 이 일대에 분수림을 조성해, 지금은 숲이 왕성하다. (사진=장태욱)

한편,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남원읍 편』에는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김무길이란 사람이 벵디왓에 마지막까지 살다가 하례리 ‘돈드로(하례2리)’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김무길 딸의 후손 며느리와 딸(오○량, 문○화)에게 물어보니 김무길은 딸만 낳았으며 아내 강 씨는 모슬포 출신이었다 한다. 이로 본다면 김무길 가족은 모슬포 쪽에서 벵듸왓화전으로 넘어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무길은 제1횡단도로 동쪽에 살았다는데, 1914년 지적원도를 보면 하례리 1883번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하례리 1876번지에는 조 씨 가족이 살았는데, 수망리 김○돈을 통해 조 씨 일가족의 이주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망리 출신 김○돈의 어머니는 조무○이다. 김○돈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를 근거로 외가의 이주 과정을 전했다.

어머니 조무○과 큰이모 조경○, 작은이모 조신○은 외삼촌 조임○과 함께 수망리 소재 민오름 뒤 산장(山場 ) 잣담 북측 수망리 1033-2 번지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데 조 씨 일가는 수망리 민오름 뒤에 살기 전, 김○돈의 외할아버지 조○○은 벵디왓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돈의 부친이 전한 얘기다.

어째서 외할아버지 조○○이 벵듸왓에 이주한 것인지 물어보니, 이재수의 난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들은 대정에 살 때 천주교와 관련된 난(이재수의 난)이 일어났고, 다른 형제가 신자라 가족이 박해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조 씨 일가는 되도록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벵듸왓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얘기는 모친 조무○이 살아생전 전한 얘기라고 한다. 며느리 한○숙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하고 1914년도 지적원도를 참고하면, 조종운(趙宗雲)은 1876번지에 살던 유일한 조 씨 성을 가진 화전민이었다. 이로 본다면, 수망리 민오름 뒤로 다시 이주했다는 김○돈의 외할아버지는 조종운임을 알 수 있다.

구술자 김○돈은 1948년생이고 한 세대를 20∼30년으로 계산하면 모친 조임○은 1920년생 전후로 보인다. 조임○의 부친 조종운은 1890년대 전후에 태어나 이재수의 난(1901년)을 겪으며 벵듸왓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종운이 어린 나이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벵듸왓으로 들어왔다는 대목에서, 그의 선대도 천주교 신자로 추정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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