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화전민 됐고, 벼랑 끝에선 반란 중심에 섰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④] 기근-화전 증가․지방재정 부족-과세와 수탈-민란

기후위기로 기근 반복
민초들은 궁핍해지고 지방 관아의 재정난에 놓여
사회 기강 문란해지고, 관아는 화전에 대한 세금 부담 높여
성난 화전민은 반란 중심에

▲ 고빼기화전에 남아 있는 도기편(사진=한상봉)

화전은 그 위치에 따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목장화전과 산간화전에 대해 전편 기사에 소개했다.


고잡(花前)화전은 숲과 가까운 곳에서 산전을 개간해 만든 화전이다. 나무가 있는 중산지역 즉, 곶(숲) 전면에 밭을 일궈 화전촌을 형성한 경우에 해당한다.

곶은 ‘고지’에서 온 말로 제주 어른들은 나무하러 갈 때면 ‘낭고지 간다’라고 한다. 나무는 밥을 짓고 곡식을 말리는 연료였다. 특히, 습기가 많은 지역에선 봉덕(돌로 테두리를 만들어 불을 지피던 화로 형 아궁이) 위에 고리를 천정에 달아 그 위에 곡식을 올려 말려야 했다. 이런 이유로 나무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연료였다. 이 연료를 구할 수 있는 곶(숲) 앞쪽은 나무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 화전민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고지 앞 화전’(‘고잡’이라 부름) 마을로는 수산2리, 봉성리 멍끌마을, 무릉리 인향동, 선흘리 벡케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엔 화전 밭이나 산전 지명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홍할망화전, 강병방화전, 무낭밭화전, 정개밭, 돌터리산전, 부수물산전, 삼젱이굴 등이 마을 인근에 위치한다.

산전은 화전과 달리 잡나무와 가시 등 잡풀이 우거진 곳을 잡목과 잡풀을 불태워 제거한 후 농경지로 이용한 케이스다. 가시자왈 지역을 개간한 것이다. 곶자왈이란 용어는 농업세대 어른들이 개간하고 숯을 굽고 나무를 할 때 부르던 인문학적 용어인 것이다.

이처럼 제주 곳곳에 화전이 산재(散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화전이 늘어나게 된 게 18세기 기후위기와 그에 따른 대기근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앞선 기사에서 언급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개인도 구휼에 참여해야 할 정도로 기근은 극심했다. 1724년 의귀 출신 김남헌(金南獻)이 양곡 1,340여 섬을 풀어 도민을 구휼함에 영조가 비단옷을 하사했으며, 1795년엔 김만덕 역시 500여 섬으로 도민을 구휼했다.

그런데 이런 구휼이 제주도 섬사람들의 생활고를 해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기근은 지방 재정을 어렵게 했고, 사회 기강을 문란하게 했다. 19세기 들어 민란이 끊이지 않은 이유인데, 그 민란에는 늘 화전 이슈가 있었다.


▲ 탐라직방설 표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하던 시절 문하생이었던 이강회(李剛會, 1789~?)는 고향인 강진과 흑산도에서 제주도에 대해 전해들은 얘기를 모아 1819년에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현행복 번역, 도서출판 각)을 집필했다.

『탐라직방설』은 총 2권 1책으로 구성됐는데, 제1권은 제주의 인문․지리․경제․군사를 다른 보고서이고, 제2권은 1813년에 발생한 양제해(梁濟海) 옥사와 관련한 열전이다.

이강회는 당시 제주도의 가장 골치 아픈 적폐세력으로 ‘상찬계’를 거론하면서, 아전 300명이 서로 찬조하기를 약속하니 신(神)을 불러 모은다고 했다. 그가 얘기한 ‘신’은 돈을 의미하는데, 아전들은 묵혀둔 목장밭을 가로채거나 미역산지에 세금을 거둬 들이고, 산소송․땅소송․군징집으로 신(돈)을 불러 모은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부패한 상황에서 ‘어찌 양제해(梁濟海)란 자가 세상이 태어나오도록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저항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양제해는 아전들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고, 스스로 장두가 되어 반란을 지휘하기로 모의했다. 하지만 동료였던 윤광종의 고발로 반란은 사전에 발각됐고, 양제해는 지독한 매를 맞고 숨을 거뒀다.

양제해 옥사가 발생했을 당시, 제주 사회는 반복된 흉년과 기근에 관(官)은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다. 굶주린 백성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세금과 부역 등으로 민초들에게 고통을 안겼을 뿐이었다.

왕권이 약해지고 질서가 문란해진 건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862년(철종 13) 2월에 농민봉기가 삼남(三南)지방 일대를 휩쓸었다. 임술민란인데, 제주에서는 동년 9월과 10월·, 11월 세 차례에 걸쳐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제주도 봉기의 중심엔 성난 화전민이 있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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