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한 그루, 초여름 마을엔 꽃바람이 분다
[주말엔 꽃] 저지리 멀구슬나무 꽃
한경면 저지리에 명이동못이라는 멋진 연못이 있다. 그 연못 동쪽 160미터 쯤 되는 거리에 하늘을 가리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뉘집 마당에 심겨진 것인데. 큰 가지가 길가로 나와 터널을 이룬다. 나뭇가지마다 연보라 꽃이 피었는데, 눈이 내린 것처럼 가지마다 수복하다. 가까이서 보니 멀구슬나무다. 예전 집주인이 딸을 위해 어린 나무 한 그루를 심었을 것인데, 자라서 동네에 멋을 더한다.

멀구슬나무는 말레이반도가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와 일본, 타이완, 중국, 네팔, 인도, 히말라야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선 전라남도, 경상남도, 제주도 등 남부에 서식하는데, 특히 제주도사람들과는 오래전부터 친숙한 나무다.
낙엽성교목이어서 겨울에는 잎을 남김없이 떨어뜨린다. 그런데 4월이 되면 메마른 나무에 물이 올라 검은 가지마다 연둣빛 잎이 돋고 자색 꽃을 피운다. 키 큰 나무가 세상 다른 나무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하게 멋을 내고, 사람들에겐 그늘을 만들어준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멀구슬나무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꽃은 5월에 가지 끝 잎겨드랑이에 무더기로 핀다. 꽃봉오리는 진한 보라색이었다가 꽃잎을 펼치면 안쪽 연한 청자색이 드러난다. 이 무렵에 나무 주변엔 향기가 진동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기간에 쓴 시 ‘농가의 늦봄’에는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라는 대목이 있다. 꽃이 지고나면 향기가 사라지는데, 그 무렵이면 여름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나무의 꽃은 멀리서는 그냥 화사한데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깔이 다채롭고 구조도 특이하다. 수술은 진한 보라색으로 열 개가 통을 이루어 울타리처럼 암술을 둘러싼다. 암술은 노란색인데, 수술통보다 짧고 다섯 갈래로 나뉘는 게 특징이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대추 모양의 초록색 열매가 달린다. 열매가 다 자라고 10월이 되면 익어 황색으로 변하고 나무는 잎을 떨궈 앙상한 나무에는 황색 열매만 주렁주렁 남게 된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 들녘에 먹을 게 없을 때 새들이 이 열매를 좇아 모여든다.

멀구슬나무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우선, 줄기와 뿌리, 열매에 해충 성분이 있어서 민간에서선 구충제로 쓰이기도 했고, 농가에선 살충제로 사용됐다. 또, 꽃이 향기가 있어서 과거엔 제주도 민가에선 돗통(재래식 변소) 옆에 심었다. 나무에서 나는 향이 돗통에서 나는 악취를 줄여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생장속도가 빠르고 목질이 부드러워 가구를 제작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예전 제주도 사람들은 집안에 멀구슬나무 한 그루를 심어뒀다가 집안에 시집가는 딸이 있으면 베어서 궤를 짰다.
나무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뭘 그리 보냐.”고 물었다. “나무가 멋있어서 보는 중”이라고 답했더니, “이 나무 때문에 요즘 신경이 쓰인다.”라고 말했다.

이 나무가 있는 집터는 할머니 친척 땅이었는데, 주인이 돌아가시고 자녀 중엔 여기에 살 사람이 없었다. 결국 자녀들이 이 집터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새로운 주인은 이 나무에 반해서 집터를 산 것 같은데, 사람들은 나뭇가지가 길가로 나와서 큰 차의 통행을 방해하니 나무를 베어내라고 말한다는 것. 새로운 주인장으로서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 됐다.
할머니는 “예전 같으면 이 정도 나무로 궤짝 여러 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신도 시집갈 때 멀구슬나무 궤짝을 가지고 갔다면서.
예전 같으면 남의 부러움을 샀을 고목인데 세상이 변해서 팔이 한 짝 잘릴 위기에 놓였다. 세상이 자동차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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