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서양인이 본 제주 화전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악’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③] 목장화전과 산간화전

목장화전은 집단사회를 구성, 작은 화전마을이 모여 큰 마을을 구성
산간화전은 한라산 가까운 곳에 형성, 작은 마을을 이루기도 하고 한 가정이 화전을 일구기도
1905년 말콤 앤더슨과 이치카와 상키, 한라산 방문할 때 산간화전 가정 경험하고 기록

▲ 도순동 '구머흘' 화전봉덕. 구머흘은 대표적인 산간화전 터다.(사진=한상봉)


조선후기 대기근이 반복됐고,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경작할 땅을 찾아 목장지대로 사람이 몰렸다. 조선후기 화전이 늘어난 이유인데, 화전은 그 위치에 따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목장화전은 말 그래도 목장 안에 불을 놓아 농사를 짓는 화전이다. 필자가 조사한 도내 목장화전은 그 이름을 열거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많다.

상효동 - ‘남당모르화전’과 ‘사두석화전’,
동홍동 - ‘연자골’
서홍동 - ‘생물도’,
호근동 - ‘총각산전’과 시오름 주변화전,
영남동 - ‘서치모르’와 ‘판관마을’
하원동 - ‘너른도’와 ‘윤못’
중문동 - ‘사단동’과 ‘모른궤’, ‘상문리’
색달동 - ‘빌레흘’과 ‘냇새왓’
표선면 가시리 - ‘해남굴’
남원읍 신흥리 - ‘신물동네’, 수망리 - ‘장구못’과 ‘싱구물’, 한남리 - ‘굴치’와 ‘머체왓’, 위미리 - ‘감낭굴’, 신례리 - ‘이생이화전’, 하례리 - ‘벵듸왓’,
안덕면 상천리 - ‘천망동’과 ‘큰빅데기’, ‘거머흘’, 광평리 - ‘조가외’와 ‘마통동’, ‘몰통도’, 상창리 - ‘올린튼물’과 ‘모록밭’, ‘대난도’, 동광리 - ‘무등이왓’
아라동 - ‘민밭’
애월읍 봉성리 - ‘솔도’, 상가리 - ‘원동’과 ‘윤남비’
조천읍 교래리 - ‘고영듸’와 ‘집터왓’
한림읍 금악리 - ‘벨진밭’과 ‘셋가시’ 등


이들 목장화전은 숙전(熟田, 해마다 농사짓는 밭)화된 화전터로, 많은 인원이 한 군데 모여 살며 집단사회를 만들었다. 화전마을 주민들은 방애돌을 이용해 곡식을 찢고, 함께 거름을 만들어 사용했다.

하나의 목장화전이 주변의 작은 화전마을을 흡수해 중심화전마을로 성장하는 사례도 있었다. 지금 영남동이라 불리는 ‘서치모르’는, 주변에 있던 ‘판관마을’과 ‘왕하리마을’, ‘구머흘마을’, 시오름 남쪽 ‘가시왓케’의 화전민들이 모여 큰 화전마을로 성장했다. 화전마을이 통합돼 행정적으로 하나의 동으로 인정받은 사례다.


▲ 중문동 상문리 화전마을에 남은 돗통시 흔적(사진=한상봉)

산간화전은 목장화전보다 한라산 산체에 가까운 곳에 마을을 이루거나 개별적으로 개척한 화전이다.

미국인 동물학자 말콤 앤더슨(Malcolm P. Anderson)은 1905년 8월,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의 포유동물 포획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 이치카와 상키(市河三喜)를 동반하고 한라산의 동물과 곤충을 조사했다.

앤더슨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1914년에 이르러 제주도를 다녀온 경험을 「Forty Days in Quelpart Island(제주도에서의 40일)」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또, 일본인 통역관 이치카와 상키(市河三喜)는 앤더슨보다 앞선 1906년에 일본에서「濟州島紀行」이라는 제목으로 그 여정을 발표했다.

두 사람이 답사한 곳은 제주 성내(城內)와 한라산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들의 기행문에는 한라산 동․식물 조사 외에 1905년 당시 제주의 모습, 목장지대와 한라산 주변의 민초들의 삶이 담겨있다.

이들은 능화동(현 제주시 오등동)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는데, 거기서 화전민 가정과 교류한 경험도 기록에 남겼다.

능화동 화전민 가정은 3대가 함께 살았고, 가옥은 이방인의 눈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결하다고 했다. 그리고 돌이 많은 땅에서 매우 좁은 면적에서 농사를 짓는데, 호두만큼 작지만 매우 맛이 좋은 감자를 재배한다고 했다. 그리고 변소에는 돼지를 기른다고도 했다.

이들이 남긴 능화동 가정에 대한 기록은 산간화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산간화전 주민들은 살며 산림지에서 감자, 메밀을 재배하거나 사냥, 숯 굽기, 채집 등으로 삶을 영위했다. 이들은 관(官)의 눈치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며, 한 곳에 정주하기 보다는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화전을 일궜다.


▲ 조천읍 교래리 '집터왓' 주변 화전민 터. 대표적인 산간화전 터다.(사진=한상봉) 

멧돼지나 우마, 노루 등의 농작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집 주변의 울담뿐 아니라 자신의 집터보다 위쪽에 별도로 목장담과 같은 돌담을 쌓기도 했다. ‘웃상잣’ 또는, ‘상올잣담’으로 불리는 잣담이 그것이다.

다음은 필자가 확인한 산간화전 터다.

상효동 - ‘기전모르화전’
영남동 - ‘판관마을’과 ‘코빼기화전’
도순동 - ‘구머흘’과 ‘왕하리’, ‘좌명선이터’
하원동 - ‘강정윤친밭’
남원읍 수망리 - ‘먹모르친밭’, 한남리 - ‘엄실이친밭’
오라동 - ‘김별장친밭’
오등동 - ‘능화동마을’과 ‘진페기지슴’, ‘남열밭’, ‘관음사 고씨 집터’
월평동 - ‘내머리친밭’
용강동 - ‘고장의친밭’
봉개동 - ‘북페도친밭’
애월읍 봉성리 - ‘존내틈 고영백 집터’와 ‘한데비케 화전’, , 유수암리 - ‘상옥이친밭’, 소길리 - ‘박서당친밭’과 ‘석송이친밭’, 고성리 - ‘행옥이친밭’
조천읍 교래리 - ‘개남술화전’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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