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등에 업혀 감낭굴화전에 들어간 아기, 유력 가문 일궈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㉙] 남원읍 위미리 감낭굴화전(2)

앞선 기사에서 감낭굴화전은 위미리의 유일한 화전이었다고 기술했다. 당시 감낭굴에는 천주교인이 2명 예비교인이 16명일 정도로 꽤 큰 화전촌이었다. 감낭굴화전에 누가 최초로 들어와 살았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 노리못. 감낭굴화전 주민들이 생활용수를 구했던 연못이다.(사진=한상봉)

위미리 마을지 『위미리지』에는 감낭굴화정에 살았던 고 씨 집안과 관련한 기록이 있다. 『위미리지』 58쪽에는 ‘종정동은 1830년경 고영훈(高榮訓)이 입주를 시작으로 30호 가량이 모여 살았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정동은 위미3리가 신설되기 전 마을이름인데, 최초로 사람이 살았던 장소는 위미리 300번지 일대 ‘안종정굴’이라 불리는 곳이다. 제주4·3 때 불에 타며 사라진 옛터다.

고영훈이 종정동에 살기 전 행적을 족보와 후손의 구술을 통해 확인해 보니 덕수리 출신 고서운(高瑞雲:1761-1836)이 사망하고 아들 두 형제 일종(日宗:1801-1862), 한수(漢秀) 중 큰아들 일종이 모친(李氏:1762-1839)을 모시고 위미리 감낭굴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감낭굴로 이주한 일종은 이곳에서 목축 일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 일종의 아내(李氏:1803-1860)의 묘가 덕수리에 있는 것으로 봐 결혼은 덕수리 사람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결혼한 시기를 스무 살 전후로 본다면 일종이 위미리 감낭굴로 이주한 시기는 1820~1830년 사이가 된다. 감낭굴에서 돈을 번 일종은 아들 고영훈(高榮訓:1826-1888)을 낳고 ‘안종정굴’ 374번지에 내려와 터를 잡은 것이다. 위미리마을지에 고영훈이 1830년경에 종정동에 정착했다고 하는 데에서, 고일종은 20살 경인 1820년 즈음에 덕수리에서 결혼하고 감낭굴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감낭굴에서 번 돈으로 ‘안종정굴’에 땅을 사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위미3리 종정동 설촌의 시초가 됐다.

이후 고 씨 집안은 가문이 번성했는데, 그와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고일종이 사망한 이후 옛 자손들이 감낭굴 집터에서 장례를 지내기 위해 유숙하는데, 고영훈의 옛 집터에 나그네(지관)가 방문해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는 신세를 진 것에 대한 보답으로 소려니오름 앞자락 능선에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며 장소를 봐주고 떠났는데 이 터에 묘를 쓴 후 과연 자손이 번성했다고 한다.


▲ 화전민이 살던 집터에 돌담과 대나무만 남았다.(사진=장태욱)

고영훈은 위미3리로 이주 후 목축을 하며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목감도 지냈다. 그는 종정동과 감낭굴 옛 집터 목장지를 오가며 목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 씨 가족은 감낭굴에서 1830년대 종정동으로 이주했기에 1914년도 감낭굴 지적원도에는 집이 보이지 않으나 위미리 374번지에 후손 고인학(高仁鶴)이 살았고 그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토지조사 당시 원지적도에 나타난다. 구술자 고〇석, 고〇철의 얘기와도 일치한다.


한편, 위미리 4581번지와 4582번지에는 형제로 보이는 양지현(梁智鉉), 양명현(梁明鉉)이 살고 있었다. 4581번지는 올레길 흔적만 남아있는데 이곳 번지에 대해 위미리 후손 양〇국(1942)에게 확인해 보니 자신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터고 지금도 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 말했다. 고조부의 묘는 한림읍 명월리에, 증조부 묘는 호근동 ‘각시바위’에, 증조모의 묘는 위미리에 있는데 어째서 증조부 묘가 ‘각시바위’쪽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 위성사진에 나타난 감낭굴호전의 위치

족보에는 양〇국의 조상은 부친 양한종(梁漢宗) - 조부 양명현(梁明鉉) - 증조부 양기길(梁基吉) - 고조부 양정(梁延)으로 나타난다. 이중 조부 양명현이 1914년 지적원도에 확인된다. 고조부 시절 한림읍 명월리에서 대정읍 신도리로 이주한 후 증조부 때 위미리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감낭굴에 살았던 할아버지 양명현이 손자 양〇국에 얘기해주길, 형제 2명이 있어 형은 걸었고, 명현은 어려서 업혀 감낭굴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구술자가 1942년생이니 이에 2세대 60년을 더하면 1880년대를 전후로 감낭굴에 들어 왔을 것이다. 걸어서 온 형인 큰할아버지 이름이 지적도에 보이는 양지현(梁智鉉)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명현은 이생이(이승악)오름 김 씨 화전민 출신의 딸과 결혼했다. 이생이오름 출신 김 씨 가문과 외 6촌이라 하는 것으로 봐서 김구하, 김구택의 누이나 여동생이 명현 할아버지와 결혼한 것이 된다. 감낭굴에 함께 살던 큰할아버지 양지현은 일제강점기에 감낭굴에서 신도리로 다시 이주했다 한다.


이후, 감낭굴에 홀로 있던 할아버지 명현만 위미리로 내려오게 되는데 아버지 양한종(梁漢宗)이 17살 때 위미리로 내려왔으며 자신도 위미리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구술자 본인이 1942년생이고 토지조사사업에 집터 기록이 있음을 볼 때 1914~1942년 사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위미리로 내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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