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체왓화전 김 씨, 일본서 돈 벌고 왔지만 4.3 못 넘겨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㉔] 남원읍 한남리 머체왓화전 사람들

<전편에 이어>


구슬에 따르면 머체왓에는 김 씨들도 많이 살았는데,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집안이었다. 남원리 안〇〇(1935생)은 남편 김〇호(1937생)의 부친이 머체왓화전에 살았으며 김〇호와 누나 김〇일, 여동생 김〇열이 머체왓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위탁 소를 기르며 살았다고 하는데, 수망리에 궨당(인척)들이 산다는 것으로 봐서 수망리에서 머체왓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 머체왓 집터 흔적(사진=한상봉)

기존 화전민이 떠난 이후 일제강점기 신례리 이생이오름(이승악) 뒤에 살던 화전민 김구택(金龜澤 1865생)의 후손 김선익이 머체왓으로 이주해 왔다. 김구택의 후손은 이생이오름에서 번 돈을 모아 토질이 좋은 머체왓에 땅을 사서 이주한 것이다.

현〇〇은 이생이오름 화전에서 한남리 현 씨 집안으로 시집온 김〇익의 아들인데, 어머니와 자신의 형제들은 제주4.3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을 증언했다.

김〇익은 이생이오름화전 김종팔의 유일한 딸인데, 제주4‧3으로 한남리가 불에 타자 아들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이생이오름 뒤로 피난 갔다. 그런데 친정에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오빠 김근방이 사는 공천포로 내려가 오빠 집 문방 하나를 얻어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김〇익과 두 아들을 잡아 서귀포로 이송했고, 열흘간 솔동산 창고에 가뒀다. 당시 현〇〇은 나이가 어려 바닷가에서 놀았으나 어머니 김〇익 등은 수용 생활을 하다 10여 일 뒤 풀려났다. 이들은 남원리에서 2년 생활한 뒤 한남리로 올라가 성담을 쌓았다.


▲ 머체왓화전에 남은 돗통(사진=장태욱)

한편, 편백나무가 펼쳐진 1646번지에는 김백송(金伯松)이란 사람이, 1647번지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후손인 김〇근이 지금 남원리에 살고 있는데, 김〇근의 조상은 부친 김〇일- 조부 김만순-증조부 김백송을 이어진다고 했다.

김〇근은 자신의 선대가 제주시에서 화전으로 이주했고, 제주시 인척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김〇근의 할아버지는 마을지 『내고장한남리』에 보이는 힘이 쌘 할아버지 김만순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김만순은 머체왓 ‘광치우연’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김〇일 등 6남매도 머체왓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형제로는 큰아버지 김기춘, 작은아버지, 고모 3명이 있는데, 이중 김기춘은 제주4·3 이후 다시 머체왓화전 집터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1967년 항공사진에는 김기춘의 집이 보인다. 지금도 이 집터 자리에는 집터 울담, 춘희(술)항아리 조각, 화덕자리 흔적이 남아 있다.


▲ 김기춘 집터의 춘희 항아리와 봉덕자리

김〇근의 부친 김〇일은 제주4·3 때 하악골을 다쳤으며 김〇일의 큰아들, 즉, 김〇근의 큰형은 한남리에서 경찰에 잡혀가 해방 불명이 됐다가 인천형무소에 끌려간 후 사망한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18살이었는데, 일본에서 생활하다 왔기에 한국말을 잘 못해 잡혀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본다면 김 씨 집안 일부는 화전에 살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돈 벌러 갔다 온 것을 알 수 있다.

홍 목수라 불리던 사람의 선친이 1642번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적원도에서 이름 확인이 안 되는 홍〇〇의 후손이 잠시 해방 이전 한남리에 거주하다 남원리로 이주를 했다는데, 다른 지역 주민은 홍근석이란 사람이 홍 목수라고 했다.

고 씨 집안에 대하여는 고사일(高士日)이란 사람이 소려니 위 ‘궤영곶’에 살았다는 증언이 있는데, 1914년 지적원도엔 고사일이 한남리 1643번지에 살았음이 확인됐다. 고사일의 후손 고두승 등은 해방 이전에 한남리로 잠시 이주했다가 제주시로 떠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살았던 곳을 ‘고사일친밭’이라 불렸다.

한남리 고〇숙(1937생)의 증언에 따르면, 머체왓화전 사람들은 한남리로 내려와 노루고기나 콩을 가져와 보리나 조로 바꿔갔다. 숯은 현금 교환용으로 서귀포까지 가져가 팔기도 했는데, 냇가에서 많이 구웠다고 한다. 머체왓 김〇임과 두 살 위 문〇수는 머체왓에서 한남리 서당으로 내려와 공부했고, 의귀리 남원북국민학교에서 공부하다 제주4·3을 만났다고 한다. 해방 이전 한남리로 이주했던 화전민 후손 중에는 사냥했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토벌대 안내원이 되기도 했는데 그 인연으로 경찰관이 되기도 했다.


▲ 1960년대 이후 조림사업이 진행되면서 머체왓화전 주변은 숲으로 변했다. 머체왓숲길이 각광을 받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한다.(사진=장태욱)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 소려니오름과 머체오름을 조림할 때 머체왓화전에 나무가 심어졌다. 신례리에서 한남리까지 지역 주민들이 식수 참여를 신청하여 머체왓 조림에 참여했다. 인건비는 하루 300원으로 신례리 사람은 신례리 1233-4번지 앞 삼거리에 가식(假植)된 나무를 등에 지고 나무 심을 장소까지 이동했다. 당시는 제주4‧3으로 중산간 주민에겐 돈이 특별히 귀했기에 한남리, 신례리 등에선 많은 사람이 조림 사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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