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근, 국마 공급지 제주도 목장에 화전(火田) 되살리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①] 화전(火田), 굴곡진 역사의 산물이다
원 간섭기에 도입
조선초기 인구 4.6%가 화전 생활
조선 초기 국마목장 설치하고 목장 내 농사 금지
17~18세기 대기근 발생하자 조정에서 화전 허용한 듯
미개간지나 휴경지에 불을 놓아 야초와 잡목을 태워버리고 농경에 이용하던 농법을 일반적으로 화전(火田)이라 부른다. 그런데 과거 화전민의 후손이나 옛 화전을 기억하는 제주의 고노(古老)들은 대부분 화전을 ‘친밭’이라 불렀다. 그밖에도 지역에 따라 ‘캐운밧(焚田)’, ‘낭친밧(木折田)’, ‘멀왓’이라고도 불렀다.
제주의 농업은 오랜 옛날에 화전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화전을 그 위치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눠보면,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 등이 있다.
제주의 목축은 원(元)제국 제주강점기에 시작됐다. 몽골의 목자(牧者)들은 잠시 머무는 임시집터 주변에 불을 놓아 밭을 개간했다. 몽골의 이동 방목 풍습과 관련한 것인데, 목장에 방애불을 놓는 목양방식이 도입돼 목장화전이 시작됐을 것이다.
제주도 목장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고득종(高得宗)의 하잣 축성 건의와 관련한 기사에 나타난다. 「세종실록」에 ‘築牧場, 不分公私馬, 入放場內, 居民六十餘戶, 悉移於場外之地, 從願折給’라는 기사가 있다. 목장에 60호가 있을 것으로 여겼으나, 1430년 2월에 실제로 이주한 숫자는 344호라는 기록이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370여 명이 하잣담 안에서 목장밭을 일구며 살고 있던 것이다. 4년 뒤 「세종실록」에 기록된 제주 인구가 6만3474명이니, 제주도 전체 인구의 4.6%가 목장 안에는 살고 있었다.
과거 말(馬)은 이동과 사냥, 전쟁 등에 꼭 필요했는데, 조선조정은 제주도를 국마를 공급하는 목축 중심지로 삼았다. 조정이 목장운영 방침을 정하면서, 화전민은 목장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세종16년(1434) 6월 14일 기사에는 그와 관련한 기사가 나온다.
병조에서 아뢰길 “한라산(漢拏山)의 산상(山上)과 산하(山下)의 평지에서 목양(牧養)할 수 있는 곳은 모두 경작을 금하고, 이 앞서 장내(場內)에 기경(起耕)한 땅은 비록 목장을 파한 뒤에라도 다시 경작하지 못하게 하소서. 목장 밖에 현재에 경작하고 있는 땅도 사사로 자기가 목장을 쌓게 하고, 묵은 땅을 경작하는 것도 금하여 목양을 넓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화전이 목축에 방해가 되므로 목장 안은 물론이고 그 밖에 있는 화전도 모두 폐하겠다는 결정이다. 이런 조치로 화전은 한동안 쇠퇴했는데, 그런 흐름은 적어도 임진왜란까지는 이어졌다.
그런데 17세기 말부터 조선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 기간에 기근이 극렬했던 원인은 소빙기라는 지구적인 기후변동과 관련이 있다.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9)은 소빙기의 기후현상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숙종실록」에는 그와 관련해 30여 편의 기사가 등장한다. 숙종10년(1684) 6월20일의 ‘호남의 곡식 5천 곡을 배로 운반하여 제주의 3읍을 진제하라고 명하다’라는 기사와, 숙종29년(1703) 12월 15일의 ‘제주도에 기근이 들어 곡식을 풀어 진휼하다’는 기사 등이 대표적이다.
기근은 제주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곡식을 풀어 진휼했던 숙종은, 제주도 백성에겐 매우 특별한 임금이었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제주도민은 숙종의 능역(陵役, 왕릉을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맡겠다고 자처했을 정도였다.
기근은 18세기에도 이어졌다. 경종3년(1723년) ‘제주민이 산죽(山竹:조릿대 열매)으로 연명했다’는 기사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제주도에서는 굶주림을 피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들은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물질을 하고 고기를 잡았는데, 제주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두무악(頭無嶽) 마을'이라 했다.
굶주려 고향을 버리는 사람이 늘어가자 정부는 제주도 목장에서 주민들이 밭을 일구고 농사짓는 것을 비공식적, 공식적으로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조세를 거둘 수도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결정이었다.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데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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