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운영 표고장 주변 화전민들, 농사도 짓지 않았을까?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㉛] 남원읍 신례리 ‘사이고 표고장’ 주변 화전
일본인 마수다이치지(桝田一二)가 쓴 『제주도의 지리학적 연구』에 신례리 화전과 관련한 내용이 보인다. 그는 ‘남원 수악동은 신례리를 모촌(母村)으로 하여 김 씨 및 정 씨 등에 의해, 묵지동은 한남리 이 씨, 고 씨 일족에 의하여 각각 새로운 취락의 발전생성을 보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이생이(이승악)오름 주변을 수악동으로 잘못 이해하기는 했는데, 김 씨와 정 씨가 살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자료다. 이 자료를 쓴 시기가 1930년대이니 이 일대 역사에 대해 참고할 만하다.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는 정 씨 화전이 보이질 않는데, 나중에 들어와 잠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신례리에 정 씨 후손에게 물어보니 화전으로 살았다는 얘기를 들어보질 못했다고 했다. 지금 신례리에 거주하는 정 씨와는 다른 집안 가족이 이생이 주변에 살다가 어느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신례리 화전민들은 이생이(이승악)오름을 중심으로 북쪽과 제1횡단도로 위쪽, 이생이오름과 수악산(수악오름) 사이 신례천의 서쪽에 살고 있었음이 지적원도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4년 뒤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이하 제주지형도)에도 화전민 터가 나타난다. 그 위치 중 현 제1횡단도로 인근과 논고오름 남측 기슭에도 화전민의 집들이 나타난다. 논고오름 남측의 집들은 1914년 토지조사로 지번을 부여할 때는 안 보이다가 갑자기 1918년 제주지형도에 보인다. 현장을 확인해 본 결과 화전으로 볼만한 집터보다 규모가 큰 건조장 흔적이 있어 족은보리오름 남쪽 기슭 ‘궂은빌레기’에 위치한 일본인 사업가 서향(西鄕:사이고)이 지은 표고장의 부속 건물 터로 보인다.
사이고 표고장과 관련한 내용이 우당도서관이 편찬한 『전라남도사정지-제주도 부』(1931)에 나온다. 일본인 사이고는 1873년생으로 1900년 쓰시마섬으로 가서 표고버섯을 재배했으나 원료림의 부족으로 제주도로 넘어왔다. 1910년 조선이 합병되자 15년 계속사업으로 원료림 허가를 받았고, 조선인을 고용하여 대대적인 표고경영에 착수했던 사람이다. 서귀포 솔동산에 살았다.
또한, 제주연구원에서 발행한 『일본인이 조사한 제주도』에는 1928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기사 가지야마 아사지로의 ‘제주도 기행’이 소개됐다. 가지야마 아사지로는 도사(島司:도지자) 일행과 석판로(삼의악-속밭-보리오름으로 이어지던 옛길)를 건너 서귀포쪽 산길을 내려오는 도중 사이고 표고밭에 들리려 했으나 책임자 사토 씨가 일본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제주인을 고용해 일제강점기에 표고 재배장을 조성해 운영했는데 필자는 저서『한라산의 지명』(2022)에 이러한 표고장의 위치를 파악해 왜 하필 제1횡단도로(1932-1935년 건설)가 지금의 자리를 통과하는지를 밝혔다. 일본인들은 현재의 제1횡단도로 반경 300m 내에 표고장을 건설했다. 횡단도로를 건설해 이전에 지어진 표고 재배장에서 표고를 가져가고, 산림자원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1918년 제주지형도에 사이고 표고장에서 신례리와 위미리로 이어지고 길이 보이는데, 이 길 주변에 살던 화전민들이 『전라남도 사정지』에서 나오는 사람들, 즉 표고장에 고용된 조선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이고 표고장과 가장 가까이 살았던 화전민을 1914년 지적원도에서 확인해 보면, 이들은 신례리 2174∼2182번지 사이에 밭과 대지를 가지고 있음이 보인다. 이중 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2175번지에 김봉옥, 2177번지에 김봉〇, 2179번지에 김창현, 2181번지에 김창〇이 있었다. 이름에 돌림자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서로 형제였을 것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1948년 항공사진을 보면 이 지역은 당시 풀밭 으로 보인다. 화전 터를 가보면 번지 위치와 실제 집 위치는 약 40∼50m 정도 차이가 있다.
이들 김 씨들이 어디서 왔다 어디로 이주했는지는 확인치 못했다. 집터 주변은 작은 채소밭 정도 크기의 터도 있고, 울담이 조잡하고 낮게 형성되어 있으며 울담조차 없는 터도 있었다. 주변에 작은 냇가도 위치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게 하는 것으론 집터와 숯가마, 냇가에서 발견된 그릇 조각이 전부다.
평균 집터 길이는 6.5m×3.5m 내외로 사각형으로, 대부분 비슷했다. 돌담이 대부분 허물어진 것으로 봐 제주4‧3 시기에 피난민 또는, 무장대의 은거지가 되는 것을 막거나 1950년대 모슬포 제1훈련소가 들어선 후 땔감으로 사용할 목재를 베던 ‘개발단’이 허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모슬포에 제1 훈련소가 만들어진 후 밥할 땔감이 필요해지자 ‘개발단’은 경찰과 마을 구장의 협조 하에 지역민들을 동원해 전도적으로 땔감을 벌채했다. 신례리 양 모씨(1935생)는 수악교 인근에서 개발단으로 참여해 나무 자르는 일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군은 일반인 벌목업자를 고용해 나무를 베는 방식으로 땔감을 구해갔다. 이 과정에서 땔감을 지키려는 지역민과 벌목업자가 무력으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례리 2180번지 김창현의 집터에선 돌구멍으로 창문을 낸 경우도 보였고, 집 서쪽엔 화장실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고, 동쪽엔 흑탄숯을 구웠던 터가 남아있다. 김창현은 숯을 굽던 사람임을 알게 했다.
김창현 집에서 남쪽으로 130m 떨어진 곳(신례리 2181번지)에 김창○이 살았으나 집터는 인근 하찌마키길(한라산둘레길)을 내며 사라져버려 굽담만 확인할 수 있다.
신례리 2176번지 인근 냇가에선 유기그릇 조각이 발견됐으며, 2177번지에선 한쪽 면을 자연석에 의지해 지어 놓은 집을 볼 수 있다. 이곳엔 작은 마당도 있다. 이 지역 화전에선 일반적인 산전 울담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 횡단도로 위쪽의 화전민들은 사냥을 했거나 숯, 나무를 구해 팔며 생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 신례리 2176번지 동쪽 횡단도로 넘어 ‘동멍모르’ 언덕에도 한 채의 화전 집터가 확인되는데, 지적도에 없는 것으로 봐 일제강점기 이전에 화전이 살았던 집터로 추정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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