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촌가름 제1토지 사들인 화전민, 이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㉜] 이생이오름 주변 화전

이생이오름(이승악) 뒤 신례리 2172번지에 있던 화전엔 고○○, 2171번지엔 김구하가 살았다. 인근 위미리 4590번지엔 김구택이 살다가 이후 100m 북동쪽 지점으로 이주했으며, 위미리 4589번지엔 김구하의 아들 김좌익이 살았다. 김구택의 집터에서 북서쪽 450m 거리에도 집이 있었는데, 거기엔 박 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신례리 2172번지에 거주했던 고 씨는 2173번지에 밭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터 자리는 사람이 떠나고 이후 묘가 들어서 있다가 몇 년 전 이장(移葬,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된 상태다. 묘를 쓸 때, 집터 돌담을 묫담으로 활용한 것이다.


▲ 신례리 2172번지에 집이 있었는데, 이후 이곳에 묘를 쓰는 과정에서 집터의 돌담을 묫담으로 활용했다. 묘를 이장하는 바람에 지금은 묫담만 남은 상태다.(사진=한상봉)

신례리 양 아무개(1935)는 고모가 이 고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고모부 집안의 내력을 일부 알고 있다. 구술자 양 씨의 고모부는 이생이오름 북쪽에 있는 삼나무(몰마장)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고모부가 살았을 때 이생오름 북쪽 삼나무 지역이 고모부 자신의 땅이었고, 이 삼나무에 대해 벌목허가를 받아 고모부의 사위인 양완호가 사서 가지려 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나중에 유야무야 됐다고 한다. 고모부의 친족들이 애월읍 곽지에 산다고 하는 것으로 봐 이쪽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생이오름 주변 삼나무는 본래 일제강점기에 심어졌다. 그런데 제주4‧3 이후 많은 집이 불타자 사람들이 이곳 나무들을 벌채하며 사라졌고, 두세 가닥의 못생긴 삼나무 몇 그루만 살아남았다.


▲ 1948년 항공사진에 나타난 이생이오름 주변. 원으로 표시된 곳이 김구택 후손이 살던 집터다.

고 씨 화전 동쪽에는 김 씨 화전도 있었다. 김 씨 화전 가계도를 족보에서 보면 지적원도에 보이는 김구하(1863-1943) 윗대는 기혁(1839-1911)-광준(1822-?)-대규(1803)-영노(1796) 등으로 이어진다. 김영노(潁老)와 아들 대규(大珪)의 묘가 신도리 463번지 같은 곳에 있고 대규의 아들 광중(金光準)의 묘는 이생이오름 뒤에 있다. 이들이 신도리에서 이생이 주변 화전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후손 신례리 김영수(1965)는 선대가 신도리에서 하례리 ‘돈드르’로 이주해 잠시 살다가 화전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전했다.


족보를 보니 김기혁(金基赫 : 1939)은 구하(龜河 : 1863), 구주(龜珠 : 1887), 구택(龜澤 : 1879)을 낳았다. 1914년 지적원도에는 신례리 2171번지와 위미리 4589번지에는 김구하, 김구택 형제가 살았고, 위미리 4590번지에는 김구하의 아들 좌익(左翊)이 살고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구주는 먼저 해안마을로 이주를 했다. 이로 본다면 김 씨 일족은 1800년대 중후반 이생이오름 화전으로 들어와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큰아들 김구하가 살았던 신례리 2170번지에는 오름 둘레길이 뚤리는 과정에서 집터 돌담이 한 곳으로 옮겨지거나 주변의 울담으로 사라졌다. 김구하의 후손 김영수는 올해도 신례리 2170번지에 2500원의 토지세를 냈다고 말했다.


▲ 김구하의 옛집에 있던 돌담이 치워지고 없다.(사진=한상봉)

김구하 아들 김좌익이 살았던 위미리 4589번지(지번과 집터가 조금 다른 곳에 있음) 집터는 조림 시 일부 훼손되고 산전 울담이 남아있다. 인근에는 냇가도 있다. 김좌익의 딸은 신례리 양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화전 집터 언덕엔 김 씨 조상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됐다. 이 집터가 1918년 제주지형도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토지조사 4년 만에 신례리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김구주의 집안이 해안으로 내려간 반면 셋째 김구택의 후손 장남 종팔은 공천포로 이주했다. 지역민 양○선(1927생)에 따르면 김종팔이 이생이오름 뒤에 살았으며 숯굽기, 목축을 했다고 한다. 종종 서귀포에 거주하는 양윤호라는 사람이 신례리 양○만 집에 종종 머물기도 했는데, 화전민들이 만든 숯을 사서 서귀포로 가지고 팔았다고 한다.

셋째 김구택과 관련해 신례리 양○홍은 김구택이 생전에 하례초등학교 맞은편 286번지에 땅을 사 곡식을 재배한 후 쉐를 이용해 화전지로 실어갔다고 했는데 이로 본다면 화전민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 화전에서 번 돈으로 해안마을에 땅을 사 곡식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택이 하례초등학교 주변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는 데서 화전민이 결코 가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우마, 숯, 장작 등을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으며 김구택의 둘째 아들이 ‘머체왓화전’으로 이주한 것도 돈을 벌어 ‘머체왓’에 땅을 사두었기 때문이다. 김구택의 둘째 아들 후손은 현재 한남리에 거주하고 있다.

김구택과 그 후손이 살던 터를 항공사진을 통해 보면 3∼4채의 집이 확인되는데 제주4‧3을 거치며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몇 해 전까지 표고재배지로 쓰였으나 지금은 일부 집터 굽담만 두 군데 남아있을 뿐이다. ‘이승악둘레길’을 걷다 보면 쉼터 의자를 만들어 놓은 평지가 있는데, 그 일대에 해당한다. 원지적도에 보이는 4590번지를 찾아가면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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