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마수다이치지(桝田一二)가 쓴 『제주도의 지리학적 연구』에 신례리 화전과 관련한 내용이 보인다. 그는 ‘남원 수악동은 신례리를 모촌(母村)으로 하여 김 씨 및 정 씨 등에 의해, 묵지동은 한남리 이 씨, 고 씨 일족에 의하여 각각 새로운 취락의 발전생성을 보게 되
앞선 기사에서 한림읍 명월리에서 위미리 감낭굴화전으로 이주한 양 씨 집안에 대해 언급했다. 명월리 출신 양정이 신도리로 이주한 후 그의 아들 양기길이 두 아들 지현, 명현을 데리고 감낭굴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양지현은 신도리로 돌아갔고, 양명현은 위미리에 정
앞선 기사에서 감낭굴화전은 위미리의 유일한 화전이었다고 기술했다. 당시 감낭굴에는 천주교인이 2명 예비교인이 16명일 정도로 꽤 큰 화전촌이었다. 감낭굴화전에 누가 최초로 들어와 살았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노리못. 감낭굴화전 주민들이 생활용수를 구했던 연못이
남원읍 위미리 감낭굴화전은 화전 인근 묘비 문구에서 ‘시목동(柿木洞)’이란 이름으로 확인된다. 위미리 4576~4587번지 사이가 감낭굴 화전에 들어가며, 감낭굴에서 떨어진 이생이오름(이승악) 인근 위미리 4589, 4590번지에 화전 집터도 있다. 그런데 위미리 45
궤영곶은 그 뜻이 분명하지 않으나 ‘궤엉곶’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근 하천 ‘홋긋내’, 즉 한남리 물오름 서쪽에서 다래오름(거린악, 큰거린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 북쪽으로 흘러드는 하천에 궤와 엉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곶 지역에 거주했던 화전민은 3∼
제주4·3은 화전마을을 포함해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국방부는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1월 23일에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다. 이 시기부터 이듬해 봄 3월에 이르는
굴치화전은 수망리 민오름의 서남쪽 1635-3번지에 있던 화전 터다. ‘머체왓숲길’ 동쪽 내 넘어 한남리‧남원리 공동목장에 속하는 ‘막지슨동산’, ‘밤낭밭’에 오르면 과거 오봉진이란 사람이 소유했던 땅이 있다. 오봉진의 아들 오면하는 1930년대 마을공동목장에 자신의
<전편에 이어> 구슬에 따르면 머체왓에는 김 씨들도 많이 살았는데,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집안이었다. 남원리 안〇〇(1935생)은 남편 김〇호(1937생)의 부친이 머체왓화전에 살았으며 김〇호와 누나 김〇일, 여동생 김〇열이 머체왓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남원읍 한남리는 제1횡단도로 변 물오름(동수악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과 궤펭이오름(주차장 옆)을 경계로 남동 방향으로 이어진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로 소낭당내(松木堂川:서중천로 불리는 내)가 흐르는데, 이 내(川)의 동쪽과 서쪽으로 상잣 위 중산간 목장지대에 목장화전이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과 따비튼물화전과 구진다라이화전 등에 대해 기술했다. 장구못화전에는 이재수의 난 때 화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인 가족도 있었고, 구진다라이오름엔 4.3 때 집이 불타고 목숨이 위험에 놓이자 조상 묘 주변에 굴을 파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화전민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에 살았던 양씨 집안, 고 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제주4.3 당시 화전민들은 토벌대에 피살되고 가옥은 무장대의 식량보관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 씨 집안은 천주교인 가족이 있었는데, 이재수의 난 때 화를 피해 장구못화전에
<앞선 기사에 이어>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에 살았던 양씨 집안, 고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제주4.3 당시 화전민들은 토벌대에 피살되고 가옥은 무장대의 식량보관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망리 현경생(1929생)은 일제강점기에 부친이
수망리에는 목장화전과 곶화전, 고잡(고지앞)화전 등 세 종류의 화전이 모두 있었다. 국림담의 위쪽 숲을 ‘치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국림담 아래 ‘진구술’ 목장의 풍력단지 외에는 대부분 나무가 자라 자왈과 곶으로 변하고 있다. 목장화전 지역으로는 수망리 1027~1
‘거슨내’ 주변에 몰도왓 돌방아가 있었다고 하는데, 본격적인 마을 형성을 위한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김〇차(1932생)의 구술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마을에 회의가 있을 때면 물도왓 사람들이 신흥 2리로 와서 마을 회의에 참여했고, 해방 전에는 물도왓 사람
신흥리 물도왓화전은 물도왓은 신흥리 2327번지에서 남쪽으로 2289번지까지 이어지던 화전마을이었다. 세종대왕 1430년 쌓은 하잣담이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동쪽에 마을 식수원인 ‘거슨내’가 흐르고 있다. 거슨내를 솔내(松川)라고도 부른다. 인근 무덤 비석에는 ‘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