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있고 땅도 판판 벵디왓화전, 주민 40명 다 어디로 갔나?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㉟] 하례리 벵듸왓화전(1)

남원읍 하례리의 대표적 화전마을은 벵듸왓이었다. 벵듸왓화전은 제1횡단도로 수악산(지역에서 부르는 지명으로, 오름 북서쪽에 산물이 나기 때문에 수악산이라 불린다.) 인근에 있던 마을이다. 하례리 산 21번지, 산 31번지를 중심으로 마을 동쪽에는 수악산 자락이 남쪽으로 이어지고, 서쪽에는 ‘검머들내(백록계곡으로 잘못 불리는)’가 남쪽으로 흐른다.

벵듸왓은 한라산을 횡단하는 노선 상에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였다. 필자의 『한라산의 지명』에 이와 관련한 내용을 기술하기도 했다. 위미리나 신례리, 하례리 주민들은 1960년대까지도 제주시에 사는 자녀를 위해 식량을 지고 이 길을 넘기도 했는데, 하례리 벵듸왓-통시끔-보리오름-속밭-검은기지-샘의오름-인다라-제주 시내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과거 이곳은 들판인 벵듸(오름 사이 넓은 평지) 지역이라 ‘벵듸왓’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됐다. 과거 주민들은 식수로 서쪽의 ‘검머들내’의 냇물과 수악산의 수악 산물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988년 작성된 제주지도에 수악산이 '수봉'으로 표기됐다. 그리고 수봉 서쪽에 화전마을이 나온다.  수봉 북쪽에는 성널오름이 있다.(소장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수악산(수악오름)과 관련한 지명은 옛 지도에 반복해서 나온다. 1895년 군제(郡制)가 시행된 이후 제작된 「제주삼읍전도」에는 ‘수악(水岳)’으로, 「정의지도」에는 ‘수봉(水峰)으로 나온다.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는 수악(水岳)으로 표기됐다.

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지역민들에게 확인해 보니 현○수(1935생)은 과거 주민들은 ‘수악산’이라 불렀다고 했다. 수악산 북서쪽에 물이 나는 곳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오름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 산물은 과거 목축할 때 우마나 사람이 이용했는데 평상시에는 많은 물이 나지 않으며 큰비가 와야 아래로 흘러 벵듸왓 화전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지역민이 부르는 이름과 고지도나 고서에 표기된 지명이 다른 경우에 해당하는데, 유사한 사례는 용강동 ‘논독기오름’(태역장오리오름으로 잘못 알려진 오름, 『한라산의 지명』p71)에도 나타난다.


▲ 수악산 북서쪽에 지하에서 물이 솟는다. 벵디왓화전 사람들은 이 물을 식수로 이용했을 것이다.(사진=한상봉)

1914년 원지적도를 보면, 벵듸왓에 모두 10호의 집이 있다. 이름이 확인되는 세대로는 조종운(趙宗雲)이 1876번지에 살았고, 그 외로 김 씨(1872), 임 씨(1875) 등이 확인된다.

1914년 지적원도보다 앞선 시기 벵듸왓화전에 대한 기록이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제주도여행일지』에 보인다.

이 책은 일본인 사업가 후지타 간지로(藤田寬二郞)가 1905년 서귀포 산간 일원에서 표고버섯 재배 현장을 방문했을 때, 『제주도여행일지』는 동행한 일본인이 버섯재배 현장을 그림으로 남긴 그림책이다. 책은 벵듸왓을 펜도친바(ペンドチンバ)라고 표기했다. 필자는 이 책을 분석한 후 일본인이 운영했던 근대 최초의 세 곳의 표고장(표고밭 사무실이 있는 곳)을 찾아냈는데, 모두 난대림연구소 내에 있었고 현장은 훼손되는 상태였다.


▲ 검은들내 주변에 남은 화전민 집터(사진=한상봉)

이 책은 1918년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보다도 앞서 발간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제주의 생활이나 풍경을 함께 그려놓았고 특히, 기전모르, 신근이, 양근이, 가시모르, 선돌 등 화전 지역이 구체적을 표시했다. 20세기 초반 제주도 화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포함하고 있다.

1918년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 벵듸왓을 ‘평대진전(坪垈陣田)’이라 표시하고 있다.


▲ 조선총독부가 1918년 발간한 한라산 5만분의 1 지형도에 벵디왓화전이 '평대진전'이라고 표기됐다. 벵디왓 동쪽에 수악이 있다.(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위 지도의 평대진전에는 14채의 가옥이 표시됐는데, 1914년의 지적원도에는 10호였다. 4년 사이에 4호가 더 늘어 난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도 제주4‧3 이전에 모두 사라진 마을이 돼버렸다. 40여 명 이상이 살았을 벵듸왓 화전은 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소멸하였을까?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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