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민 떠나고 무장대 은신처, 마침내 불러들인 주둔소와 골프장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㊶] 상효동 화전(4)

일제강점기에 서귀포시 상효동 선돌 일원에 화전민 여러 가구가 살았는데, 이들은 선덕사 동쪽 인근 언물내의 물에 기대어 생활했다. 그 밖에도 화전은 선돌선원 북쪽과 서쪽에도 분포했다.


■사두석화전


사두석은 남국선원의 동쪽 상효동 산 41번지에서 아래쪽 산 69-1번지 산록남로 인근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이르는 지명이다. 이 능선에 사두석(蛇頭石)이란 바위가 있다고 신효동에서 전해지는데 숲이 우거져 그 바위는 확인하지 못했다.


▲ 사두석화전. 남국선원과 선돌선원 사이 중간 지점에 있다.(사진=한상봉)

사두석 화전민과 관련 양○숙(1932생)은 일제강점기 이전 돌아가신 오○수의 선대가 사두석 근처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오씨 가족은 제주4‧3 이전에 하례리 두수오름 쪽으로 이주한 후 제주4‧3 당시 신효동 ‘뒷동산’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위 구술과 관련 하례2리 조○군(1940생)은 본인의 증조할아버지는 강정동에서 상효동 1156번지 ‘허덕이’ 목장지로 이주했고, 제주4‧3 이전에 부친 때 하례리 두수오름 뒤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두수오름 인근에 살 때 제주4‧3이 일어났는데, 두수오름 뒤편에는 오○수 가족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사두석에 살던 오○수 가족은 일제강점기 시절 두수오름 뒤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례2리 마을지 『학림지』에는 조씨 집안과 관련 ‘한양 조씨는 본래 강정리에 살다가 1853년 조양범(趙良範)이란 사람이 상효동 지경 허덕귀(허덕이목장)로 이주하여 왔다. 아들 시연(始連)과 함께 이곳에서 같이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가족은 76년간이나 이곳에서 살았다. 그후 1929년 조씨 일가는 우리 마을의 두수오름 뒤로 이주해 왔으며 조시연에게는 만석(萬石), 원석(元錫), 문석(文石) 세 아들이 있었다.’라 하고 있어 조○군의 구술을 뒷받침하고 있다. 1914년 지적원도에는, 조씨 일가가 살던 토지에 1156번지에 번지가 부여였다.

오씨 집안이 살았던 곳은 상효동 1594번지로 추정된다. 이 번지에는 집터 흔적과 그릇 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대나무가 있다. 오○수는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었던 기술자로 부친은 오○생이다. 이에 지적등기 열람을 해 보니 현재 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14년 이후 매매가 없었다면 그의 후손이 지금도 이 번지의 땅을 소유하고 세금을 내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 사두석화전에서 오씨 일가가 경작하던 화전(사진=한상봉)


상효동 1595번지에도 화전민이 살았다. 1948년 항공사진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집터가 확인되는데 그곳에 누가 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서상효 김태흡(1936생)은 고세배(?)라는 사람이 화전민 터에 살았고 속칭 ‘뱁세하르방’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린 시절 고사리철에 어머니를 따라 사두석에 가보니 사람이 사는 걸 봤었다고 하는데,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직접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고 기억했다.

■남당모르화전

남당모르는 남국선원에서 산록남로 우리들 골프장 사이를 이르는 지명이다. 1905년 일본인이 제주도에 표고재배지를 시찰키 위해 다녀가며 남긴 그림책 『제주도여행일기(濟州島旅行日記):2016』를 보면, ‘신거니(シングニ)’란 곳에 마을이 보인다. 신건이는 남당모르 바로 위 즉, 남국선원 북쪽 지역을 이른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남당모르란 지명을 몰랐기에 자신이 알고 있던 신거니에 포함해 화전 집 모습을 그려 놓은 듯하다.

이 그림책에 모두 세 채의 화전 집이 보이는데, 1905년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하지만, 1914년 토지조사사업 때 지적원도에는 화전이 살았음을 알게 하는 대지(垈) 표시가 없어 화전민들은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남당모르 지역에서 모두 떠났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남당모르 조사에서 확인한 화전 터들은 1905년 그림첩에 나타난 집으로 보인다.

좌표 33°18'47.05"N, 126°34'47.93"E에선 집터 돌담 흔적이 남아 있었고, 남국선원 일주문 동쪽 300m 거리엔 화전밭과 집터, 그릇조각, 속구린질 흔적도 보이고 있다.

▲ 1905년 일본인이 남긴 '제주도여행일기'에 신거와 남당모루 일대가 나온다.

상효동 어른들에게 전해 내려오길 (고)도빈이란 사람이 남당모르에 살았다고 한다. 보리오름 북동쪽에서 표고장을 운영했던 사람인데, 일제강점기에는 남당모르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다고 전한다. 이 어른이 살아난 곳의 켓담을 ‘도빈이케담’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우리들 골프장 위쪽에 있다.

남당모르 화전지엔 고도빈으로 추정되는 화전민 외에 누가 살았고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할 수 었었다. 남당모르 우리들 골프장 내 상효동 산 52번지엔 제주4‧3 당시 군경주둔소가 설치되어 무장대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숲속과 화전지역에 숨어든 무장대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곳으로 화전 집과 산전 돌담은 피난민들과 무장대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화전 터 확인은 제주4‧3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웃법호촌이라 불리는 상효동 1596번지 ‘양건이’ 지역엔 고○일이란 사람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1914년 지적원도에 고○일의 이름이 보이나 이후 어디로 이주했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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