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기근에 굶주린 백성, 출륙 막으니 갈 곳은 화전뿐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㊹] 조선시대 화전의 확대

생물도를 포함해 제주도화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가 살았을까?


제주에 화전이 등장하는 기록은 『세종실록』에 고득종(高得宗)이 하잣 축성 건의와 관련한 기사에 나타난다. 1430년 2월에 하잣이 완성되며 목장 안 344호를 옮겼다는 내용이다. 4년 뒤『세종실록』에는 제주 호수가 9935호, 인구가 6만3093명(濟州三邑, 人多地窄, 民戶九千九百三十五, 人口六萬三千九十三)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전체 가구의 3.46%가 목장 안에서 밭을 일구며 목장 화전민으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다. 하잣이 만들어지면서 목장밭에서 밀려난 화전민들은 상당 기간 목장 안에서 생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동규는「한국화전의 분포」에서 고려시대는 일역전(一易田, 1년 경작하고 1년 쉬는 농업), 재역전(再易田, 1년 경작하고 2년 쉬는 농업), 불역전(不易田, 해마다 경작하는 농업)이 혼재되던 농업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옥한석은「한국의 화전농업에 관한연구」에서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정주형 농업으로 정착되어갔다고 했다.


▲ 옛날 목장 내 만들어진 화전. 조선 중기 이후 이상기후와 기근이 일상됐다. 굶주린 백성들은 목장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사전=장태욱)

하지만 제주는 다른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땅이 부석하고 거칠어 여러 밭을 돌려가며 농사를 짓고 경작하지 않은 밭이 많았다. 농사지을 토지는 늘 부족했다. 화전지역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유형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집 근처는 돌렝이(작은)밭을 만든 반면 집에서 멀어질수록 면적이 큰 밭과 목장이 들어서고 있다. 교래리의 사례에서도 경우 마을 주변에 땅이 조밀하게 있으나 멀리 떨어질수록 밭 면적이 넓고 목장과 가깝게 자리하는 사실이 확인됐다.

배수호, 이명석 공저 『산림공유자원관리로서 금송계연구 : 2018』에는 조선 초기까지 누구나 (산림은) 사적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신분차별 없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유자원으로 취급되었다고 밝혔다.

김동진은 『조선의 생태환경사 : 2017』에서 산림자원은 해안이나 강가 등 비교적 개간하기 쉬운 지역부터 경작이 이뤄졌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엔 경작지가 부족해지자 산허리로 경작이 확대되며 화전민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후 위기는 비가 자주 오는 산허리로의 경작을 앞당겼다. 임진왜란 이후 기후위기로 인한 온돌문화의 확대 등으로 나무벌채가 심해지고 1675년(숙종원년) 산림보호정책과 맞물리며 정부는 화전금단조건급상목종식등사목(火田禁斷條件及桑木種植等事目)을 공포하고 산허리 이하에만 화전을 허락했다. 1746년 속대전(續大典)에는 기존 화전지만 인정하고 이후 화전경작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기도 했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화전이 발달하는 상황과 더불어 제주에서도 화전이 증가했다. 이를 부추긴 것은 한반도에서와 같이 기후 위기로 인한 부분이 강했을 것이다.


▲ 조선시대 제주도 이상기후 추이(김오진 저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에서 발췌)


1670 ~ 1671년 경신대기근, 1695~1699년 을병년간 역병과 기근, 1713 ~ 1717년 기근, 1792 ~ 1795년 기근 등 제주에는 역병과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현종실록 : 18권(1670)』9월 10일자에는 제주인구는 4만2700명이나 1672년 10월 30일에는 2만9578명으로 2년간 1만3122명의 인구가 줄었다. 1699년 제주목사 서목에는 질병 사망자가 2837명이라 당시의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계속된 기근에 노비의 신공(身貢)을 면제해주는 일도 있었다.

조정은 이 기간에 출륙금지령을 내려 제주 해안을 봉쇄했다. 무역마저 막혀 해산물이나 말을 육지에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하는 제주인들의 삶은 참담했다. 기근을 통해 제주도민이 겪은 고초는 한반도 상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이에 제주인들 중에는 목장을 침범하여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익태의 『지영록(知瀛錄) : 1696』 1695년 9월 3일과 17일자에는 기근 때문에 임금에게 건의해 공명첩(空名帖)을 팔아 곡식을 모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공명첩은 이름(名)이 비어(空) 있는 문서(帖)라는 의미인데, 관직·관작을 수여하는 의미도 있지만 포괄적으로는 양역(良役)을 면제해 주는 의미도 있었다. 또, 원둔마장(元屯馬場)에 몰래 경작하는 부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친히 교외를 둘러보기도 했다는 내용도 있다.

목장 경작 현상은 100여년 뒤인 1794년『목장신정절목 (牧場新定節目)』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바뀐 점은 이 사이 목장지 경작에 따른 세금을 징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절목에는 각 목장에서 피로 세금을 거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목장신정절목:(출처,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목장 운영 개혁을 위한 이형상 목사의 강력한 화전 단속에도 불구하고 목장 내 화전을 막지 못했다. 1732년 제주어사로 파견된 심성희(沈聖希)는 목장에 들어와 불법으로 경작하는 것에 대해 경작 당 1결(結, 농지 면적 단위로 1결은 30 ~ 40마지기)을 초과할 수 없게 했으며, 이를 감독하고 관리하지 못할 시 지방관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고 목사 역시도 추문한다고 했다. 이는 사복시가 임금에게 건의해 윤허를 받았던 일이다. 목장에서 경작이 이뤄진 것은 이 보다 훨씬 이전부터 하잣과 가까운 거리에 중산간 마을이 들어섰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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