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샘물로 벼농사 짓겠다는 화전민의 꿈, 실패한 이유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㊴] 상효동 화전(2)
조선총독부가 1914년 토지조사를 완료하고 작성한 지적원부에는 상효리 선돌 일원엔 세 군데 화전 지번이 확인된다. 상효리 1591-1593번지다. 상효동 1593번지는 선돌 앞 황솔나무가 있는 곳인데, 황솔나무 인근에 화전 가옥이 있었다고 앞선 기사에서 언급했다.
상효동 1592번지는 선돌선원 앞 대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도로 곁에 해당된다. 지금은 안쪽에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 두 집터의 돌담은 옮겨졌고, 집터는 훼철됐다.
선돌선원 앞 중심부엔 녹차 나무가 있고 곁에는 묘터 세 개가 있다. 이 묘터를 조성할 때 두 화전 집터의 돌담을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에, 집터의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591번지는 선돌선원 동쪽 작은 골짜기 너머에 자리한 곳이다. 이곳의 화전 집터의 돌담도 인근의 묘담으로 쓰이며, 집터는 소실되어 흔적을 알아볼 수 없게 됐다. 다만, 주변 경사지엔 산전담이 남아 있어 과거 사람이 밭을 경작하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묘터 주변에 대나무도 보여 과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수 있다. 보통 집터 자리에 묘를 쓰는 경우는 자신의 조상이 살았던 곳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어, 화전민의 조상이 이 터에 묻혔다가 후에 이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화전민들은 ‘언물내’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 언물내는 선돌선원 동쪽 300m 거리에 위치하는데,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 지금도 인근 주민이 수로 파이프를 이용해 이 물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물이 맑고 수질이 좋다.일제강점기 말부터 이 물을 선덕사 인근까지 끌어다 벼농사를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해방 후 제주4‧3이 지나자 누군가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조성해 물을 선덕사 서쪽 산 86-13번지까지 끌어갔다. 하지만 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논농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돼지가 사라진 이유를 물었는데, 형제는 돼지가 자기대로 죽어 자신들이 땅에 파묻었다 대답했다. 그런데 이 말은 거짓말이었고 돼지는 두 형제가 잡아먹은 것이었다. 목격자 김 씨는 선돌에는 큰 구렁이가 살았다며 어른들이 구렁이를 거시지(해코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제1 횡단도로 변 선덕사 일주문 주차장이 있는 터에도 제주4‧3 전까지도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하례리 1871번지 일원의 공간과 하천을 ‘올란도’라 하는데, 선덕사 들어가는 내 동쪽 동올란도는 약 3만 평이 되는 공간이다. 이곳에 박용환이 살았는데, 제주4‧3 이전 하례2리 뒷수오름으로 이주한 후 제주4‧3 당시 하례1리에서 무장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동올란도엔 오 씨 일족도 살았는데, 이들은 제주4·3이 일어나자 해안마을로 이주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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