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작통 피해 화전 택했는데, 자손은 지방 거두로 부상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㊷ ] 동홍동 연제골 화전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經國大典≫에는 오가작통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조문이 실렸다.

‘서울과 지방 모두에 5가를 1통으로 하고 통에는 통주(統主)를 둔다. 그리고 지방에는 5통마다 리정(里正)을,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고, 서울에는 1방(坊)마다 관령(管領)을 둔다.’

 오가작통제에 대해 그 목적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아, 어떤 목적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문이 호적조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호구의 파악, 유민의 방지, 균역의 확보 등을 주목적으로 하고, 그에 더해 재난의 구조, 도적의 방지, 향풍(鄕風)의 교정 등도 수행하도록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연제골화전에 남은 집터. 제주4.3 이후 재건된 집이다.(사진=한상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됐는데, 거기에 기후위기까지 덮쳐 백성은 삶의 터전에서 내몰려 떠돌았다. 그 결과 국가재정이 부족해졌고 조정은 주민의 유량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오가작통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반기에 기근이 극심해지자 가난한 농민과 몰락한 양반은 오가작통에서 벗어나 삶의 터전으로 상잣 위나 산림지역을 선택했다.

삶의 터전에서 내몰린 백성들은 살기 위해 화전 지역을 들어갔는데, 동홍동 연제골도 그중 한 곳이었다. 연제골화전은 솔오름 산행로에 보이는 상잣 보다도 북쪽 ‘중원이케’에 조성된 목장 화전으로, 연지골이라고도 불리었다. 한자로는 연자동(燕子洞)으로 표기했다. 동홍동 2169번지 일원에 해당하는데, 『동홍지 : 2003』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연자동 서쪽에 냇가가 있는데 이를 ‘연자골’ 또는, ‘연재골물’이라 한다. 이곳 연자골은 처음엔 화전으로 살다 묵축을 위탁 관리해 주고 경작지를 개간하면서 정착 농업을 하였으며, 이후 중산간 마을로 이주하여 온 동네가 사라졌는데 당시 연자골에는 강 씨 3부자, 김 씨 부자, 조 씨와 또 다른  고 씨, 강만석 씨 등 15여 호가 동네를 이루고 살았다.‘

1914년 제적원도를 통해 강 씨, 조 씨가 동홍동 2172와 2170번지에 살았음이 확인됐고, 동홍리 2168, 2169, 2171번지에도 이름이 확인 안 되는 사람들이 지번을 부여 받았던 사실이 확인됐다. 이 번지에 고 씨, 김 씨 등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번이 부여된 곳 주변에는 ‘살레왓’이 형성되어, 뒤의 언덕 ‘채비케’에 의지해 바람을 막고, 그 앞에서 화전을 경작했음을 알게 한다.


동홍리 2169번지는 제주4·3 이후 새롭게 들어온 사람이 살아서 지금도 집 형태가 남아 있다. 집터의 규모는 길이 11.3m, 높이 1.5m, 폭 4.5m에 이른다. 반면, 다른 화전 집터는 묘들이 들어서며 묫담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지역보다 북쪽에 있는 동홍리 2173번지에도 지번이 부여되고 있으나, 지금은 소유권자가 없어 국가소유로 넘어간 듯하다. 이상에서 본다면 조선말기 15호의 집은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되는 1914년엔 5호로 줄어든 사실이 확인됐다.


▲ 산물어위 생수가 나오던 곳(사진=한상봉)

『동홍지 : 2003』에는 ‘강정춘(1928생)은 15세에 동홍동으로 이주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토질이 좋아 보리, 콩, 피, 메일, 고구마, 채소 등을 재배했고 연자방아도 있다고 한다. 말, 돼지, 소, 닭을 키웠으며 말과 소를 위탁 관리하여 생필품 구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라는 기록도 있어, 화전민들이 어떤 경제활동을 했는지 알려준다.

필자가 구술채록을 하는 과정에서 봉개동에서 이주한 강 씨 집안에 대한 얘기를 듣고 봉개동에서 확인해 본 결과, 제주4·3 이전 회천동에서 살다가 이후 봉개동으로 이주했다는 강○기를 만날 수 있었다. 족보를 확인해 보니, 선대는 강○순-강○건-강○옥-강○모-강○원-강○빈으로 이어졌다. 이중 강○원의 묘가 서홍동에 있고, 후손 강○건은 서귀포에 살며 제주도의회 의장을 역임한 사실을 확인했다. 도의회의장의 증조부가 강○원이니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00년대 중반 경 회천동 또는, 봉개동에서에서 연제골로 들어와 정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제골 사람들은 마을의 서쪽을 흐르는 냇가와 이보다 위쪽 ‘산물어위’ 안에서 나는 생수를 이용해 사용했다. 동홍동 오○수(1934생) 씨 증언에 따르면, 산물어위에서 산물(샘물)이 나와 연제골 사람들이 이용했으며, 제주4·3 이후 동홍동 방목지라 이 물을 pvc파이프를 끌어다 목장에 이용했다. 금성목장에서도 이용했고 마을공동목장에서도 이용했는데, 지금도 목축을 했던 곳의 구조물이 솔오름 서북쪽 기슭에 남아있다.


▲ 속구린질. 과거 화전민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사진=한상봉)

연제골화전 서쪽 서홍동엔 ‘추억의숲길’에 연자골로 잘못 안내하는 ‘생물도’가 이웃해 있으며, 두 화전지역 사이 ‘벗어진임뎅이’(산 46일원) 옆으로 한라산 정상까지 쉐를 올리던 길이 있었다. 동홍동 산 1-2번지 서쪽 경계 냇가 옆 - 한라산둘레길 - 서산벌른내 - 남성대를 차례로 지나 남벽 앞 ‘검은서덕’(알방에오름으로 잘못 불림)이나 ‘움텅밭’(남벽 전면부)으로 올랐다. 산물어위에는 실제 생수(山水)이 나고 있으며 큰 엉장(바위)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터 동쪽 ‘넙작지’(솔오름 뒤 평평한 곳)에는 오○육이란 키 큰 사람이 밭을 갈며 살다 제주4·3 때 근처 ‘산물어위 엉’으로 무장대에 끌려갔다가 키가 큰 덕분에 엉 옆의 나무를 잡아 몰래 도망쳐 나와 살아나기도 했다. 
 
생수가 나는 곳 인근으론 흑탄 숯을 구웠던 터도 발견되고 있다. 제주4·3 이후 연제골은 방목지로 활용됐는데, 1980년대부터는 목축이 사라지며 자왈 지역으로 변해 나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제골엔 올레인 ‘속구린질’과 ‘살레왓’이 삼나무 조림지에 남아 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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