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마을에선 올레길이 ‘속구린질’, 가가호호 촘촘한 연결망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㉞] 신례리 이생이오름 박씨 화전

신례리 이생이오름(이승악) 화전에 고 씨와 김 씨, 박 씨 집안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했다. 이들은 농사보다는 목축과 숯 굽기에 주력했고, 그렇게 부를 일군 후 신례리 주민들과 혼례관계를 맺었다.

김구하와 동생 김구택의 집터 사이에는 번지가 부여되지 않은 박 씨 화전 집터가 있다. 이생이오름 정상에서 북동쪽 1시 방향, 삼나무와 낙엽수가 만나는 둘레길 인근으로, 일대에는 대나무와 산전 밭담, 집터와 그릇 등이 지금도 남아있다. 여러 채의 집이 있던 걸로 봐서 여기에서 여러 가족이 이웃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지적원도에 집 여러 채가 등기가 안 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소유주들이 한꺼번에 등기를 미뤘을 수 도 있고, 화전민들이 그 이후에 이곳에 들어와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 화전민 박 씨의 집터에서 확인된 깨진 그릇 조각(사진=한상봉)

박 씨 집안의 딸 박○○(1936)은 자신이 이생이오름 뒤 화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박○삼(아내 김○자)은 숯을 많이 구웠고 일제강점기에 하효동으로 이주를 했다고 증언했다.

박○○이 이생이오름 뒤에 살 때는 어린 나이여서 물 길어 오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했다. 내 고랑으로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으니, 어린 나이에 쉬울 리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무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촘항’에 담아 식수로 이용했다. 어머니는 용흥리 출신이며 부모는 제주4·3 때 하효동으로 이주했다.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해 두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오빠 중 한 명인 박○옥은 5임반의 표고장 책임자인 센도로 있었고 남편은 화전민 후손인 김○우라 했다. 박○○(1936)은 5남 1녀의 자녀를 뒀다. 이로 볼 때 여러 채가 한군데 모인 것은 이들 자녀가 성장하며 분가한 집을 추가로 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신례리 이○하(1935)도 화전 사람들은 목축과 숯을 구우며 살았다고 했다. 이생이오름 뒤 ‘해그무니소’로 들어서는 곳의 흑탄 숯가마는 김 씨 또는, 박 씨 가족이 운영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표고건조장에서 숯 굽기를 했던 하례리 고○삼(1939)은 흑탄숯은 경사진 곳에 설치하면 땅을 파고 숯터를 만드는데 일손이 덜 들어 좋았다고 했다.

지역 사람들은 이생이오름 서쪽의 내를 ‘세기내’라고, 신례리 산 3번지 일대를 ‘강생이친밭’이라 부른다. ‘친밭’은 화전을 의미하므로, 강생이친밭이라는 이름에서 화전을 일구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선 산전을 일구던 울담이 보이며 화전 집터로 추정되는 곳도 있으나 돌의 규모로 봐 집터로 보기는 힘들었다.

‘강생이친밭’ 서쪽 ‘몰타린내(신례천)’을 넘으면 신례리 2185번지에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 살았다. 신례리 2184번지에는 대나무가 확인되는데, 그곳에 강두백(姜斗百)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살았다. 강두백은 2183번지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 신례리 2185번지 화전 속구린질(사진=한상봉)

신례리 2185번지는 집 뒤를 돌담을 높게 쌓아 바람을 막았다. 집 형태도 좋은 편인데 주변에 산전이 온전히 있어 산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곳이다. 집터 규모는 8mx4.5m로, 집 뒤에는 화장실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터가 확인된다. 집의 동쪽을 붙여 ‘속구린질(올레길을 이르는 화전민의 용어)’이 신례리 2184번지로 이어진다. 두 화전 집과의 거리는 180m 내외였다.

신례리 2184번지는 한 차례 회손된 적이 있는데, 대나무가 우거져 자세한 집터 모양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한 군데 돌담 터가 확인될 뿐이다.


▲ 화전 집터 돌담과 산전(사진=한상봉)

1939년 발간되 『제주도세요람』 ‘임업-보호-산림범죄’ 부분에 ‘산림화재는 본도 특유의 방목습관에 의한 들불의 연소에 따른 것인지라 이의 미연방지책으로서 방화선의 설치와 더불어 엄중 단속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 방화선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화방지(山火防止) 부분에선 ‘특히 산간부락에 산화경비대를 설치하여 그 활동을 촉구하고 있어 그 효과가 현저하다.’라며 1938년 말 산화경방단은 전도에 113개에 이른다 하였다. 이로 보면 화전 사람들은 관(官)의 집중 감시 속에 목장이나 산속에서의 생활이 매우 힘든 처지로 내몰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지나 집터 등기를 못한 화전민은 관에 의해 쫓겨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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