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 총각 장가드는 날, 신례리가 시끌벅쩍했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㉝] 이생이오름 주변 화전 김 씨 집안

앞선 기사에서 신례리 이생이오름(이승악) 화전에 고 씨와 김 씨, 박 씨 집안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했다. 이들을 농사보다는 목축과 숯굽기에 주력했고, 그 결과 적잖이 부를 일구기도 했다. 김구택의 경우, 당시 신·하례리에서 가장 토질이 좋다는 예촌가름(지금의 하례초등학교 주변)에 토지를 사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서상효 양○○(1937생)은 자신의 아내가 신례리 김 씨 집안 출신이라 화전 생활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다고 했다. 양 씨의 처가는 이생이오름 뒤에 집 세 채을 갖고 있었다. 이곳 남자들이 혼기가 되면 신례리에서 처녀를 구했고 신례리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화전 청년이 장가를 들 때면 장인도 우시(둘러리)를 갔다 온 적도 있다는 걸 들었다고 했다. 화전 사람들은 신례리 사람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이렇게 맺은 인연이, 훗날 화전민들이 신례리로 이주한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례리 양○○(1936생)은 자신이 어릴 때 이생이오름 뒤에서 화전 가옥과 밭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6살 무렵에 고사리를 채취하고 동백 씨를 줍기 위해 이생이오름 뒤로 갔는데 거기에서 빨간색 감자를 재배하는 걸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 이생이오름 해그무니소 주면에 남은 숯가마 터(사진=한상봉)

양 씨가 봤다는 화전은 큰외삼촌(김종팔)의 집터라고 했다. 어머니는 김종팔의 동생으로 신례리 양 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고 했다. 당시 화전지역 주변은 가시자왈이었으며 쉐들도 봤다고 했다. 양 씨는 김구택이 사망하고 김종팔이 살던 집이 있던 위미리 4590번지 일대를 본 것으로 보인다.

양 씨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중산간 마을은 양반촌, 해안마을은 못 사는 곳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양촌사람이 해안마을 포구에서 궤기(고기)를 살 때도 ‘궤기 팔아줍써!’란 표현이 아닌 ‘궤기 포!’라 짧게 말하며 무시하듯 말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례리는 양촌(陽村)이라 말을 타고 통과하질 못해 내리고 지나갔다고도 한다. 김 씨 화전민이 마을보다 위에 살던 사람이지만, 경주 김 씨 가문이라 양반처럼 높게 봤다고 한다. 이로 보면 경주 김 씨 가문은 일반인들에게 양반의 후손으로 인식된듯하며 일제강점기까지도 일반인들에겐 조선 시대의 인식이 어느 정도 남아있음을 알게 한다.

위미리 고○○(1936생)은 화전 사람들과 관련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이생이오름 화전으로 갔는데 김잉이(예명으로, 김종팔로 추정)란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축산을 하는 해안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줬다. 잉이 어른은 화전지역에 살았기에 주변의 쉐(소)들을 돌봐줬고 쉐가 이동한 위치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 화전민이 숲을 굽던 가마의 흔적이 이생이오름 뒤에 남아 있다.(사진=장태욱)

위미리 ‘감낭굴’이나 이생이오름 뒤에 살던 화전 사람들은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잘라 해안마을에 팔기도 했다. 또, 어디로 가면 어떤 나무가 있는지 알기에 나무 위치를 알려주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화전터 위로 나무하러 가기도 했고 촐(띠)도 빌 수 있을 때라 아버지와 함께 이생이오름 뒤로 가게 됐는데 마차가 고장 나거나 수리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 산으로 오른 것이다.

구르마에 쓸 나무도 참가시나무가 아니면 다른 것은 재질이 좋지 않아 일부러 참가시나무를 골라 베어 와야 했다. 어느 날 이생이오름 동북쪽 삼나무지대 ‘몰마당’ 쪽에서 개가 나타나 짓는 일이 있었다. 이에 아버지가 “얼마 없으면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없어 무장대가 나타났다. 산에서 훈련하던 무장대들로 총도 가지고 있었으며 5임반 무장대 훈련장소와 가까운 곳이었기에 이들을 만난 것이었는데 아버지와 자신에게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만 하곤 험하게 대하질 않았다고 한다.

마을이 위급해지자 아버지는 농사해놓은 곡식을 수확하는 게 다급해졌다. 위미 목장 ‘뽀르재동산’ 위쪽 100m 지점에 밭이 있었는데, 곡식을 수확하고자 하던 시기에 제주4·3의 긴장이 주변을 감돌았다. 아버지는 “이걸 추수해 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다.”라면서 마차를 끌고 올라가 추수를 하는데, 어디선가 “빵!, 빵!” 총 소리가 들렸다. 어린 마음에 잔뜩 겁을 먹었다고 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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