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속에 이끼 낀 돌방아, 누가 왜 만들었나?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㊵] 상효동 화전(3)

조선총독부가 1914년 토지조사를 완료하고 작성한 지적원부에는 상효리 선돌 일원에 화전 지번이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에 선돌 일원에 화전민 여러 가구가 살았는데, 이들은 선덕사 동쪽 인근 언물내의 물에 기대어 생활했다. 그 밖에도 화전은 선돌선원 북쪽에도 드넓게 분포했다. 기전모르화전이다.

  기전모르

기전모르는 상효동 산 80, 산 81번지에 걸쳐있는 언덕이다. 그런데 『서귀포시지명유래집 : 1999』에는 그 위치가 산 94번지로 엉뚱한 곳을 표시하고 있어 독자들은 주의해야 한다. 지명유래집에 보이는 산 94번지는 ‘웃허덕이’ 목장 지역이다.


▲ 상효동 기전모르화전 터(사진=한상봉)

기전모르는 과거 우마들이 풀을 먹던 곳이고 동상효 사람들이 멀리 ‘진달래밧’으로 우마를 방목하기 위해 오르내리던 지역이기도 했다. 『한라산의 지명:2022』을 보면 기전모르가 방목길의 경로로 나오는데, 상산방목 때 산림으로 들어가는 출발 지역인 샘이다. 기전모르에서 소나 말을 키우던 사람들은 서상효→산냇도→안간장→애기난궤도→개천이도→기전모르를 따라 오갔다.

하례2리 마을지 『학림지:1994』에 ‘빙듸왓을 비롯하여 올란도, 어웍도, 밧진모르, 상효지경 선돌 앞, 기전모르 등 여러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전모르에 화전민이 살았음을 알게 한다.


 기전모르화전

『학림지:1994』 61페이지에는 입촌 성씨와 관련 ‘1840년경 시조의 27대인 현대홍(玄大弘)이란 사람이 상효동 지경 화전 기전모르에서 살다가 직사(하례2리 지명) 부근에 내려와서 살기 시작했다.…현재 우리 마을 현종대는 처음 입촌한 현대홍의 6세손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확인되는 기전모르 화전터로는 산 80번지 송전탑 위쪽 100m 지점과 남국선원 북쪽 1km 지점 산 1번지에서 발견되는 화전터(33°19'28.59"N, 126°34'22.16"E)가 있다. 이 두 화전 중 한 곳이 현 씨 집안의 선대가 화전을 일구며 살던 곳임을 알 수 있겠다.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를 벌이던 시기 지번이 부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대홍은 1910년대 훨씬 이전, 조선 말기나 대한제국 시대에 하례2리 마을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 기전모르화전에 오래된 돌방아가 남아 았다. 기전모르에 화전민이 살아던 건 1918년 이전의 일이다. 100년도 넘은 돌방아에 이끼가 두텁께 끼었다.(사진=한상봉)

기전모르 두 화전지역 인근에선 산전 울담, 그릇조각과 숟가락, 돌방아가 발견됐다. 이 먼 산속까지 돌방아가 있었다는 건 이례적인데,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이거나 먼 곳으로 가서 곡식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방아를 만들었을 것이다. 돌방아를 만들 정도로 돌을 잘 다루던 화전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산속에선 습기가 많아 곡식을 서둘러 말리고 도정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었을 것이다.

천정에 ‘고우리(고리)’를 만들어 밑에 봉덕에서 불을 피워 곡식을 말렸다. 이렇게 말린 곡식은 인근 화전이나 해안마을로 내려가 도정해 와야 하는데 돌방아가 있다는 것은 도정 때문에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된다.

이곳 사람이 살던 화전지역은 오지 탐험을 하는 기분으로 가 봐도 좋을 곳이다. 돌방아가 있는 화전은 친구 고대용의 제보를 받고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제보를 계기로 인근에 산전 터도 추가로 조사를 할 수 있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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