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람한 체구에 자연적인 용모, 한라산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사람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㊻] 구한말 제주도 화전의 위축 과정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목장에 빠르게 화전이 형성된 배경을 앞서 설명했다. 관아는 목장화전 주민에게 장세와 가경세를 걷어들여 필요한 경비로 사용했다.

반면, 산림보호에 대한 재제로 곶화전은 목장 화전보다 늦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벌채와 관련해하여서는 마을에서 곶 안의 나무를 베는 시기를 일정한 기간으로 정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관리인을 두어 이웃마을에서 나무를 베어가지 못하게 했던 덕수리의 사례(『제주생활사 : 2016』)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엄격한 제한으로 인해 곶화전은 갑오개혁을 전후로 생성됐을 가능성이 많다.

1860년 심동신 어사가 떠나고 2년 뒤 강제검의 난이 발생했다. 강제검은 강 방장으로도 불리었는데, 지역민 신○홍은 그가 동광리 무등이왓(동광리 275-3)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강제검과 관련한 기록에 ‘중장도’에 모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지금의 ‘간장동네’인 동광마을을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제주-대정-중문으로 이어진 교통의 요지인로 인근 무등이왓에 강제검이 살았기에 집결 장소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 건양원년 서홍화전동호적초. 출처 고00 소장
1894년 갑오개혁의 결과로 이듬해 산마감목관이 그 직을 반납하고 이때부터 공마대신에 돈으로 납부하는 금납화 정책으로 바꿨다. 또한, 신분제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난 이들이 화전을 삶의 터전으로 정하고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갑오개혁 이전 왕실, 중앙관청, 지방관아에서 각각 수취하던 세금이 일원화되었고 세금징수는 탁지아문(度支衙門)이 관장했다. 하지만, 이 개혁도 실패했다. 아관파천 후 돌아온 고종은 황권을 강화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궁내부에서 목장세, 화전세, 환곡의 징수를 무리하게 시도했다.

1897년 제주목의 화전세 규정액은 1,200석이었으나 실제 거두어들인 액수는 1,838석이다.(박찬식, 『1901년 제주민란연구』 : 2018) 여기에 지방 토호들의 횡포와 이병휘 목사의 가혹한 징세에 항거하며 방성칠이 ‘무등이왓’에서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무등왓은 제주4.3 까지만 해도 공동생활 터인 돌방아간이 5개나 있던 큰 마을이었다.

『자료집 일본신문이 보도한 제주도 : 2006』에는 1896년 공마(貢馬) 대신 5000냥, 장세 7000냥, 낙마세 150냥을 부과하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목축은 쇠미한 상태로 목장엔 말 300-400필 만 있다고 했다. 더욱이 ‘목장은 현재 도민의 자유 개간에 맡겨 관유지의 소작료와 같은 세를 징수하고 있었다. 도민들은 이를 개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소유의 우마를 방목한다. 부유한 자는 10-20마리를 가지고 있으며, 산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2~3마리의 소와 말을 키우고 있다.’라는 대목이 있다. 관영목장지에 화전민들이 마음대로 들어가 목장을 개간했으며, 개인의 우마들도 옛 10소장 관영 목장지를 이용하는 등 어떠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게 한다. 갑오개혁 이후 목장지에 화전민들이 들어갔을 것으로 보이는 화전 마을로는 가시리 해남굴 화전, 아라동 민밭 화전이 있다.

1901년 6월 21일자 「황성신문」 찰리사 황노연의 보고에는 화전은 국가 땅이라는 내용이 있다. 때문에 화전 경작지는 법적으로 본래 국가 땅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토지권은 국가가, 경작권은 화전민이 갖는 형태였던 것이다. 이에서 목장지에 경작을 한 대가로 제주목은 세금을 받아 지방세에 충당했다.

하지만, 1907년 통감부는 내장원에서 관리하던 황실 자산인 목장 등을 역둔토 조사 시 화전민 경작권을 무시하고 나라 땅으로 귀속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화전민들은 경작권이 소멸하게 되는데, 경작권을 잃은 화전민들은 해안마을이나 보다 아래쪽 화전지로 이동하거나 소작인화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西烘火田洞戶籍草(서홍화전동호적초,이하 서홍 호적초)』의 년도 별 호구는 1896년 34호에서 1907년엔 7호로 줄어들었다.


▲ 역둔토매불허가증. 출처 고00 소장

이는 대한제국의 징세강화 여파와 통감부의 신민지 지배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경작권을 금지시킨 일제는 1912∼1914년간의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기존 기득권이 있는 화전민의 토지만 인정하고 나머지 화전민지 땅을 조선 총독부가 관할하게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일본인나 지주 등 자본가에게 매각해 통치자금 확보수단으로 삼았다. 역둔토(국유농지)를 불하한 것이다.

 미즈키 도라오(水城 寅雄)의 『제주의 경제-제주도의 사람과 마을:1935』 중 엔 제주도의 마을별 호구 수를 가늠할 만한 내용이 나온다.

1917년도에 각 면으로부터 제출토록 한 제주도지지조서(濟州島地誌調書)에 실려 있는 500부락 호수를 다음 6단계로 나눠보면 10호 미만 71부락, 10호 이상 20호 미만이 95부락, 30호 이상 60호 미만이 110부락, 60호 이상 100호 미만이 87부락, 100호 이상 150호 미만이 58부락, 150호 이상이 79부락으로 되어 있다.

이를 참고로 한다면 10호 또는 20호 미만 중 화전민 촌이 있었을 것이고 특히 10호 미만인 경우는 화전촌일 가능성이 높다. 산간과 중산간을 구분치 않아 71개 마을 중 어느 정도가 화전촌으로 포함됐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기준.츠르다 고로오(鶴田吾郞)는 『제주의 경제-제주도의 자연과 풍물 : 1935』에 화전민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 섬(제주도)에는 화전민이 있습니다. 매일 밤 들판을 태우는 불길이 몇 리에 걸쳐 번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화전민의 풍속도 또한 이곳 특유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커다란 체구를 하고서 한라산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고 해서 속인들 하고는 별로 교섭도 갖지 않는 그들인 만큼 그 용모도 실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머리에 노루 모피로 만든 모자를 씁니다. …(중략)… 그들은 조끼를 입고 발에는 각반 모양의 것을 붙인 짚신을 신으며 지게를 지고 허리에는 작은 칼을 찹니다. 의복은 감물로 물들여 입는데 이것도 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입니다.  이들 사나이들은 산에 올라가서는 개를 동원하여 노루를 잡는 것인데 평상시에는 화전을 경작하고 땔감을 장만하기도 합니다만...’

위 내용은 제주시 방향에 있는 곶화전 사람들의 생활을 알게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마수다 이치지는 『제주도의 지리적 연구-제주도의 취락 : 1995』에서 화전 아래 해안마을에서 화전지로 사람들이 들어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신례리 사람 등이 수악동, 한남리는 묵지동, 감산리는 천서동과 상창리, 아라동은 민전동, 월산동은 해안동 이생동 마을을 형성시켰다고 했다. 또한, 그는 연제골은 서홍리 김 씨 일족(가족)이, 벵듸왓은 상효리 오 씨 일족이, 묵지동은 한남리 이 씨 , 고 씨 일족이 , 생물도는 김 씨, 정 씨 고 씨 일족이 마을을 형성시켰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현재도 연구자이 이를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과거 목장지에 조성된 화전인데 지금은 숲으로 변했다.(사진=장태욱_

하지만, 앞서 필자가 조사, 기술한 화전 내용을 보면 해안지역 마을에서 같은 지역 화전지로 이주한 사람들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연고가 없는 타 지역에서 이주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오히려 타지에서 이주한 화전민들이 화전지를 버리고 같은 지역 해안마을로 이동하고 있음이 보여 일본인이 기록한 이 자료는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