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시대, 화전민과 숲지기 곤장 쳐도 제주도숲 못 지켜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㊺] 화전의 확대와 숲의 파괴
조선후기에 기후위기가 반복되면서 기근은 일상화됐고, 화전의 확대는 숲의 파괴로 이어졌다.
김영우의 『조선 숲은 왜 사라졌는가 : 2022』에는 숲의 파괴 과정을 담은 내용이 있다. 1500년대 임진왜란 후에는 도성 중심으로 산림이 훼손되었는데, 이런 현상이 1600년대에는 도성 밖 경기·황해 지역으로, 1700년대엔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내용이다. 인구 증가와 기후 위기, 1600년대의 온돌보급이 산림 훼손에 영향을 미쳤고, 1800년대에는 화전으로 훼손이 가속화됐다.
소빙하기 기후 위기가 생활환경에 영향을 미쳤는데, 제주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화전민이 경작지를 찾아 관의 관심이 덜한 목장지 위쪽 상잣 너머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전민들은 세금을 내야 하는 10소장 안쪽 대신에 상잣 밖으로 이동하며 목장세를 내지 않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제주시 지역은 상잣이 해발 600미터 인근에 설치되어 있어, 국영목장 관리기부터 갑오개혁 이전까진 목장에 화전민이 들어갈 수 없었던 반면, 서귀포시 지역은 상잣 밖 속칭 ‘중원이케’라 불리는 목장지가 있어 화전 경작에 유리했을 것이다. 서귀포시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은 화전마을이 형성된 이유다.
제주시 지역은 후기할 남열밭, 진페기지슴, 능화동, 고 장의집터 등이 모두 상잣 위 숲 안에 위치하는데, 서귀포시 지역은 생물도, 연자골, 장구못, 냇서왓, 천망동, 조가외, 올리튼물, 영남동, 너른도 등이 모두 ‘중원이케라’ 불리는 이 지역에 들어섰다.
이뿐 아니라 중산간에서 해안으로 이어진 곶자왈 인근 지역도 숲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화전민들을 땔감을 얻기 위해 이곳 숲의 나무를 사용했다. 인구의 자연증가와 더불어 나무가 있는 곶자왈 인근에 사람들이 추가로 들어왔는데, 이 과정에서 산림은 축소되고 마을은 점점 확대됐다.
『탐라순력도』중 「한라장촉」에 보이는 대로 초악(草岳)에서 고산 당오름까지가 산림지역이었으나 현재는 당시 숲은 사라지고 없다.『남사록』에 김상헌 어사가 대정현에서 모슬포를 지나 명월진으로 이동하며 두 곳의 숲을 지났다고 했는데,「한라장촉」에 보이는 산림지역을 통과했음에서 알 수 있다.
정약전은 『송정사의 : 1804』에서 화전과 경작으로 산림이 사라지고 심지어 상을 치루는 관(棺)의 재료가 없어 백성이 짚과 이엉으로 초장(草葬)을 치른다고 언급했다. 극심한 나무 부족은 당시 자연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해안가 섬마을의 옛 토롱 풍습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문제다.
1817년 대정현감 김인택(金仁澤)이 남긴 『약칭 대정현어중일기(丁丑六月 日 大靜縣御中日記)』(오성찬, 『대정고을』p170, 반석, 1988)를 보면
-. 본 현의 호적부(生産文書)를 열람하였다. 머리에 제 몇 통 몇 호, 무슨 성씨의 소사(某姓召史) 년 월 일생 아들 누구라 쓰고 그 밑에 줄에는 아버지는 누구라고 썼다. 이는 이 섬에 여(女) 호주를 인정하는 소치이다.
-. 營門(관아)의 官文(공문서)에 의하여 현민 24명에게 각각 곤장 다섯 대 씩을 쳤다. 곶에다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곶이라는 곳은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에 치솟아 산을 덮은 한라산록인데 진상하는 여러 가지를 이곳에서 베어내기 때문에 범하기를 금지하는 것이 읍의 전래인 것이다.
-. 곶지기 네 사람에게 곤장 다섯 대씩을 쳤다. 화전함을 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호적부 작성 방식은 정해진 체계에 따라 계속 이어져온 방식임을 알게 한다. 또한, 곶 화전 단속에 대한 내용이 김인택 현감 시기인 1817년의 기록인데, 제주에서도 한반도에서와 같이 숲을 감독하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동진은 『조선의 생태환경사 : 2017』에서 정약용의 『경세유표 : 1817』를 근거로 양전(量田)과 화전 결수가 비슷한 규모라고 했다. 이는 화전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상태에 있었으며 기후위기로 인한 세수결손은 화전세을 통해 충당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제주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진행되고 있었다. 이원조(1841-1843년 재임)의 『탐라록(耽羅錄)』을 보면 세수 부족으로 화전세를 받아 서당의 경비로 충당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1860년 암행어사로 제주에 온 심동신(沈東臣)은 지침 혹은 규칙이라 할 수 있는 절목(節目)을 만들었는데 『함께 만드는 마을지 - 애월읍』 편에 고문서 자료로 실려있다.
-. 장세(場稅)와 경작세(耕作稅)는 중앙정부에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제주목에서 사용될 용도로 사용된다. 산간에서 농사를 짓는 건 법률이 있는데 지속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이를 어기고 있다. 아전들도 들어오는 세금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두고 있다. 이러다가 민둥산이 되어 공사(公私)에 쓰이는 재목들과 진상하는 여러 나무들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 장세와 가경세는 이미 정해진 것이 있는데, 근래에 더 거두고 있고 이에 따라 뇌물도 성행하고 있다. 밭 상태에 따라 배정하여 비리가 없게 하라.
장세와 가경세 등 목장 화전민이 내는 세금은 정해져 있었으며 국세가 아닌 제주목에서 지방세로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또한, 세수 확보를 위해 제주목에선 화전민의 경작을 묵인하거나 뇌물을 받아 눈감아주기까지 하고 있다. 이는 화전으로의 이주를 더욱 부채질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관의 통제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상잣 밖 목장지에 대한 개간을 자유롭게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단, 목장지 내부에서도 관이 세금을 받아 경작이 이뤄지고 있음은『목장신정절목』에 알 수 있다. 이 절목을 통해 1700년대 중반 이후 목장 내에선 허가된 지역에 한해 경작을 안정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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