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유자를 사랑한다. 당유자는 시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이 섬에서 자생했는데, 몇 차례의 기후변화에도 여태 잘 살아남았다. 특별한 농약도 없었고 수탈에서 벗어나려고 백성이 귤나무를 죽이는 일도 있었지만, 당유자만은 농가의 마당에서 잘도 버텼다.▲ 동홍동
진펭이굴 화전은 지금 사이프러스골프장 4홀과 6홀 사이 냇가 일원에 있던 마을이다. 진펭이굴의 설촌에 대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일제강점기까지 10여 호의 주민이 살다가 1945년 해방될 때 3가구가 남아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도와 1948년 항공사
예전엔 집집이 일력이 있었다. 집에 걸어두고 날짜에 맞춰 매일 한 장씩 뜯어내며 날이 가는 것을 확인했다. 일력에 날짜와 요일 말고도 음력날짜와 물때 24절기 등 필요한 정보를 담았으니, 일력이 있어야 절기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일력이 다시 주목을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다. 성산포항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화물은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는데도, 성산포항에서 화물과 승객을 더 실었다. 사고가 뻔히 예견되는 상황인데도 사무장 강O근의 위세에 눌려 선장은
앞서 화전지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제주 화전이 어느 특정한 고지나 경관 지역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음을 명칭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그 구분에 정확한 기준은 없는 실정이다.
색달동 냇서왓은 1948년 항공사진에선 40채 내외의 집들이 보인다. 이로 본다면 냇서왓은 위쪽 모라이오름 ‘빌레흘’ 화전민들이 이주해 살았을 가능성이 있고, 인구가 자연적으로 증가하고 자녀가 분가하는 과정에서 집이 늘어났을 수도 있다. 냇서왓 출신 김〇열은 제주4·3
앞선 기사에서 남영호 선장 강ㅇ수가 1970년 12월 14일, 서귀포항에서 배에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하도록 실은 선원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배가 그날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도 승객과 화물을 더 실었다. 바닷물이 갑판
일제는 1918년 을 공포하고, 이를 바탕으로 1919년에는 임야정리조사를 실시했다. 1921년엔 관변단체 ‘조선산림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합 수는 전국적으로 1344개였는데 조합은 산림보호, 조림, 이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무등이왓. 제주도에서 4.3의 피
남원읍 신례리 마을 산간에 이생이오름(이승악)이 있는데, 1918년 지형도에는 오름 북동쪽에 여러 화전민의 집이 보인다. 이곳에 살던 김씨 집안은 신례리 2170번지 화전 터에 대한 세금을 지금도 내는데, 토지세가 2500원이라고 했다. 선대의 가계도를 보니 한경면 신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승객과 선원 210여 명을 태우고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앞선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승객 30여 명은 승선 신고도 되지 않은 채였다. 배는 화물창은 물론이고 객실과 갑판까지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그리고 저녁 7시25분에 기항지인 성산
서귀포시 중앙동에 6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야학, 오석학교가 있습니다. 약 50명의 자원봉사 교사와 100명의 만학도 어르신이 있는 교육공동체입니다. 글을 몰라 한글을 처음부터 배우시는 반부터, 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반까지 다양한 반이 있습니다.오석학교
제주도 화전민은 일제가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1906년 이후 급속히 줄었다. 1911년에 산림령이 발효되고,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일주도로가 개설됐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15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이, 1918년에는 임야조사사업이 시행됐다. 일제가 추진한 이런
갑오개혁 이후에도 제주목장은 10소장 자체가 폐장된 것이 아니라 운영되고 있었다. 10소장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화전민이 거주하며 각종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인이 남긴 기록으로 확인된다.▲ 상문리 화전민 터(사진=한상봉)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여세를
남영호는 1970년 12월 9일 부산항을 출항해 서귀포항에 도착한 후 10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남해안에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서귀포에 체류하고 바다가 잠잠해지고 난 후에서 운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해 14일 오후 5시, 서귀포항을 출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