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 때 교인만 18명이던 위미리 감낭굴화전, 다 어디로?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㉘] 남원읍 위미리 감낭굴화전

남원읍 위미리 감낭굴화전은 화전 인근 묘비 문구에서 ‘시목동(柿木洞)’이란 이름으로 확인된다. 위미리 4576~4587번지 사이가 감낭굴 화전에 들어가며, 감낭굴에서 떨어진 이생이오름(이승악) 인근 위미리 4589, 4590번지에 화전 집터도 있다. 그런데 위미리 4589, 4590번지는 신례리 이생이오름 화전과 생활권이 같아 신례리 화전에 묶어 얘기하고자 한다.

박찬식의 「1901년 제주민란에 나타난 교폐(敎弊)와 ‘물고자(物故者)’」에는 정의군의 천주교인 수가 101명, 예비교인 수는 382명으로 나온다. 감나무골에 교인 2명, 예비교인 16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감나무골’이 감낭굴화전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 위미리 감낭굴화전 집터(사진=한상봉)

『함께 만드는 마을지 교래리 : 2019』에는 ‘먹모르’를 감나무골이라 하고 물찻오름 남쪽에 있다고 기록됐다. 반면, 필자는 ‘먹모르’에 대해 앞서 ‘먹고흔모르’라고 설명하고 위치를 지역민의 구술을 근거로 수망리 곶 화전임을 특정했다. 교래리 마을지에 소개된 물찻오름 남쪽 감나무골(먹모르)과 위미리 감낭(나무)굴은 거리적, 공간적으로 너무도 다른 곳이다. 때문에, 1901년 제주 신축민란(이재수의 난)에 나오는 화전 감나무골은 위미리 감낭굴화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자료에 비춰 본다면 일찍이 천주교가 제주에 들어온 이후 화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상효동 양근이 화전, 중문리 녹화지화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을 통해 천주교인들이 박해받고 사망에 이르자 그 세가 급속히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쇠퇴 과정은 차후에 생물도화전 호족초(戶籍草)의 인구 감소 상황을 다를 때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난 시기 감낭굴화전 어느 집안이 천주교인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901∼1914년 사이 일어난 민란과 일제강점기 초 산림령과 토지조사 사업과정을 거치며 많은 화전민이 생활터전을 떠났고. 그 결과 1914년엔 9가구만 남았다.

1914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시점을 근거로 하면 감낭굴화전엔 양 씨 3가구, 강 씨 2가구, 고 씨 1가구, 현 씨 1가구, 김 씨 2가구 등 모두 9가구만 남았다. 이후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한남리로 편입된 한남리 1648, 1649번지에도 이름 확인이 되지 않는 2가구가 살고 있었다. 이들도 행정구역이 달라졌을 뿐 같은 감낭굴화전 사람들이었다.


▲ 지적원도에  나오는 가옥의 거주인 이름

4년 후 제작된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는 감낭굴을 수악동(水岳洞)이라 잘못 표기하고 있다. 수악동은 신례리 화전마을을 이르는 지명이니 주의해야 한다. 이 지도를 보면 당시 감낭굴 주변의 길 노선이 보이는데 ‘머체왓화전’으로 이어진 길이 지금의 넙거리오름 앞을 통과하는 게 보인다. 소려니(사려니)오름 북쪽의 한남리 ‘궤영곶화전’과도 교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위미1리와도 교류하고 있었다. 산간 교통의 경유지 역할을 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감낭굴 사람들의 식수원은 소려니오름 남쪽 380고지, 한남시험림 탐방안내소 서쪽 150m 거리에 나는 생수를 이용하거나, 위미리와 한남리 경계지점의 ‘노리물내’ 하천의 물을 이용했다.


▲ 생수터(사진=한상봉)

이곳 사람들은 주로 사냥과 목축을 했으며 메밀과 감자 등을 재배하였다. 작물 재배를 했던 산전은 넙거리오름 북쪽에 위치한 ‘사슴산물’ 산전(넙거리오름, 소려니오름, 머체오름 사이 조림지)과 넙거리와 소려니오름 사이 ‘목안동산’ 산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중 ‘목안동산’ 산전은 한남시험림 탐방안내소에서 380m 거리에 산전을 새롭게 정비해 놓아 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축할 때는 인근에 있는 ‘노리(루)물’을 이용했기에 몇 해 전까지도 습지처럼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매립되며 사라져 버렸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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