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가 물고문으로 민간인 죽어갈 때 고구마로 토벌군 구워삶은 화전민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㉖] 남원읍 한남리 굴치화전(2)

제주4·3은 화전마을을 포함해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국방부는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1월 23일에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다. 이 시기부터 이듬해 봄 3월에 이르는 약 5개월 동안 토벌군이 수행한 ‘중산간지역 초토화작전’으로 섬에 피바람이 불었다. 95%의 마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해 마을에 남은 주민은 군인에 의해 몰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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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머체왓화전이 먼저 불에 탔으며 굴치화전은 조금 더 이후에 불에 탔다. 그런데 한남리 굴치화전 현O능의 집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통 큰 어머니 송 씨의 처세술 덕이다.

당시 9연대 병력이 ‘거린오름앞밭’ 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고구마를 쪄서 큰 대나무 소쿠리에 담은 후 집 앞마당에 놓았다. 앞선 기사에서 기술했듯 어머니 송 씨는 굴치화전 주변 목장에서 소를 수십 마리 키울 정도로 부를 일군 화전민이었다.

어머지가 고구마를 놓고 가면 9연대 병력(충남부대)은 당연하듯이 이걸 먹고 갔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화전민 현 씨 집과 9연대 사이에 자연스럽게 유대감이 형성됐다.


▲굴치화전에 쇠막으로 추정되는 곳(사진=한상봉)

‘머체왓숲길’ 옆 서중천 서쪽에 ‘어걸시궤’가 있는데 궤의 전면은 깊이 약 3.5m, 폭 7m 내외로 돌담으로 둘러싸였다. 사냥꾼이나 마을 공동목장을 이용하던 테우리들이 궤어서 잠을 자기도 했던 것으로 전한다. 이 궤가 제주4·3 때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 송 씨가 한남리 주민을 목격한 후 남긴 증언에 따르면, 차량을 이용해 교대로 ‘어걸시궤’에 왔다 갔다 하는 군인들이 있었다. 군인들은 ‘어걸시궤’에 머물면서, 피난민이나 의심자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어걸시궤’ 앞 냇가에서 잡아온 사람들 머리를 잡고 물에 담그는 고문을 반복했다. 한남리 아무개는 이 궤에서 여러 명이 숨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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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걸시궤. 제주4·3 때 군인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곳으로 전한다.(사진=한상봉)

굴치화전 현 씨 집안 가족은 군인들에게 도움을 줬기에 직접적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슬 퍼런 소개령을 오래도록 피할 수는 없었다. 1948년 12월이 되자 군인들이 집으로 와서 “여기 있으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간에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현 씨 가족은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의귀리로 소개됐고, 이후 다시 남원리 바닷가로 가서 움막을 지어 살았다. 그동안 굴치왓화전에서 피땀 흘려 일군 부는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현재 굴치화전 터는 목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훼철됐다. 쉐막으로 추정되는 한 곳과 돌을 모아 놓은 베케, 폭낭(팽나무)이 남아 있어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릇 파편이 흔적으로 남아 있어서 사람이 살았음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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