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월평 해녀, 소말리아 사람보다 못한 생활한다. 그러나”

[아카이브 월평마을과 바다 ②] 월평마을 마지막 두 명의 해녀

앞선 기사에서 월평마을이 행정소송 끝에 어촌계를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촌계는 있지만, 어촌계에는 어업면허가 없다. 월평마을 해안에 대한 어업면허가 강정동어촌계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월평마을 주민들이 뼈아프게 여기는 대목이다.

월평어촌계가 10년 전에 처음 설립됐는데, 마을에는 그보다 오래전부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녀들이 있는게, 이들은 어촌계 계원도, 수협 조합원도 아닌 상태에서 물질하며 마을 바다를 지켰다. 지금 마을에는 문원자(78), 강순부(68) 씨 등 두 명의 해녀가 남아 있다.


▲ 월평마을 강순복 해녀(사진=장태욱)

행정이 다른 마을에는 해녀 탈의장을 만들어주고 태왁과 잠수복을 지원하지만, 월평 해녀들에게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70대 이상 해녀가 받는 고령해녀 수당도 월평 해녀들은 받지 못한다.

게다가 이 마을 해녀들은 날마다 큰 위험에 노출된다. 물질하러 가는 길이 너무 험하기 때문이다. 월평은 대포와 더불어 서귀포에서 해안절벽이 가장 발달한 마을이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바다로 내려가려면, 절벽 틈으로 난 좁을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등반로처럼 길이 험하기 때문에 비가 내린 후라면 미끄러워 넘어질 수도 있다. 해녀들은 걸을 때마다 벼랑 아래로 구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바다와 집을 오간다.


▲바다로 진입하는 입구에 걸린 위험 표지. '출입금지' 푯말이 있는데, 해녀들은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길을 오간다.(사진=장태욱)

해녀가 활동하는 공간 역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다. 절벽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면 ‘짐꾼내’라는 좁은 만(灣)을 만난다. 만은 지하에서 샘솟은 물이 양쪽에서 흘러 모여 Y자 형 계곡인데, 이곳에 작은 바위그늘이 있다. 이 Y자 형 계곡과 바위그늘은 오래도록 해녀들의 쉼터였다. 잠수복을 갈아입을 곳도 마땅치 않아 바위그늘 앞을 망으로 가리고 그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해녀 두 사람 가운데 강순부 씨를 14일에 만나 그동안의 바다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강순부 씨는 1956년 안덕면 대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대평리에서 어촌계장을 12년 동안 역임할 정도로 가족은 바다 생활에 익숙했다. 그런 분위기의 영향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물질을 익혔다.

“물질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다. 친구들끼리 바다에서 어른들 하는 걸 따라하며 자연스럽게 익혔다. 난 물질에 재주가 있어서 처녀 때부터 대평에서 1등 해녀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28살 되던 해에 월평에 시집을 왔다. 월평은 대평과 달리 바다에 큰 관심이 없는 마을이었다. 물질을 하는 사람도, 고기를 잡는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시집을 와보니 마을에 해녀 13명이 있더라. 그중에 내가 가장 어렸다. 대평 해녀가 60명이 넘을 때도 내가 1등 해녀였는데, 월평에도 당연히 내가 최고였다. 월평 어른들은 내가 결혼한 후에 길에서 만나면 ‘월평에서도 네가 제일 물질을 잘하냐?’라고 묻더라. 그래서 나는 ‘고작 13명 중에 1등 못하겠냐?’라고 대답했다.”

그 13명이 한 명씩 돌아가시거나 연로해서 물질을 그만뒀고, 그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강순부 씨는 40년 동안 월평 바다에서 물질하며 받은 고충과 서러움이 적지 않다고 했다.


▲ 짐꾼내. 초록색 망 뒤에 바위그늘이 있는데, 해녀들은 그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기에 잠수복을 보관한다.(사진=장태욱)

월평마을에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어촌계가 없었다. 어촌계가 결성된 이후에도 어업면허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해녀활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해녀로 물질하면서 수익을 올렸다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수협 조합원 가입도 안 됐다.

“내가 물질해서 소라를 잡으면 이걸 수협을 통해 판매할 수 없다. 올레시장에 오래 거래한 가게가 있어서 거기에 판다. 모두 비공식적인 것이다.”

수협 조합원이 아니기 때문에 잠수복과 테왁 같은 도구도 지원받지 못한다. 그리고 해녀 탈의장 같은 편의시설도 지원되지 않는다. 이 같은 처지에 대해 강순부 씨는 “나는 소말리아인과 같은 생활을 하는 해녀”라고 말했다.

강 씨가 해녀라는 사실을 증면하는 건 오직 해녀카드 한 장인데, 그것도 겨우 받았다.

“해녀카드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행정에서 해녀로 활동한 근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친정인 대평리에 가서 어촌계장과 이장 도장을 받아왔다. 월평 어른들 해녀카드도 내가 여러 장 만들어줬다.”

월평마을이 예전에 어촌계를 설립하고 어업면허를 받았다면, 다른 마을 해녀들처럼 좋은 여건에서 물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월평 해녀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그동안 강정 해녀들이 강순부 씨에게 강정동어촌계에 가입해서 같이 물질을 하라고 권한 적도 있는데, 강 씨는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강정 해녀들이 같이 물질하자고 했다. 그런데 우리 바다를 지키고 되찾는 게 중요하지 나 혼자 살아보겠다고 하면 되겠나?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현재 생활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당국의 무관심 속에 위험이 방치되는 건 견디기 어렵다. 해녀가 인류문화유산이라고 하는 시대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 하나 없는 것 또한 너무 억울하다.

“내가 무슨 큰 욕심 낼 게 있나? 우리가 바다로 다닐 때 위험하지 않게 길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컨테이너 하나 놓아서 우리가 옷이라고 갈아입을 수 있게 해주면 좋지 않겠나?”

그동안 당국의 무관심 속에 월평마을 해녀의 안전은 방치됐다. 언제 끝나지도 못할 ‘바다 되찾기’ 싸움, 바라보는 늙은 해녀의 가슴이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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