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에서 부상, 밤마다 계엄군이 꿈에 나타난다”

‘서귀포 6월 사업회’ 9일, 광주민주화운동 무명용사 증언 듣는 간담회 개최

1980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7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도시인 서귀포에도 해마다 6월 항쟁을 기념하는 시민 모임이 있다. 1980년 6월에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하는 등 항쟁에 동참했던 시민들이다. 당시 청년들은 ‘서귀포 6월 민주항쟁정신 계승사업회’(회장 이영일, 이하 ‘서귀포 6월 사업회’)라는 모임을 결성해 민주화 운동의 뜻을 잇는 행사를 개최한다.

‘6월 사업회’는 9일 오후 5시, 서귀포 흑한우명품관 회의실에서 ‘6월 항쟁 37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총상을 입었던 무명용사 두 명을 초청해 1980년 5월 광주가 이들의 삶에 드리운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 '서귀포 6월 사업회'가 9일 저녁,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총상을 입은 무명용사를 초청해 증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사진=장태욱)

증언자로 참석한 이는 장규범, 김재귀 씨다. 장규범 씨는 당시 25세로 계엄군의 만행에 저항하며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 21일에 총상을 입었고, 김재귀 씨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시민군에 합류해 도청을 사수하다가 5월 27일 새벽에 총상을 입었다. 장규범 씨는 왼쪽 엄지손가락에, 김재귀 씨는 오른손 손바닥과 새끼손가락에 당시 총을 맞은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 장규범 씨는 일찍이 제주도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고, 감재귀 씨는 여전히 광주에 살고 있다.

사회자의 질문에 두 명의 무명용사가 대답하는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진희종 제주도 사회협약위원장이 사회를 맡았다.

사회자 :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 어떤 신분으로 어떻게 항쟁에 참여했나?

장규범 : 5.18 당사 택시를 몰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군인들이 아버지 같은 택시 손님을 때렸고, 택시를 부셨다. 화가 나서 우리 택시기사들이 힘을 합쳐서 5월 20일에 군인들 앞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총을 맞았다.


▲ 장규범 씨는 당시 택시기사로 군인들의 만행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다가 총상을 입었다.(사진=장태욱)

김재귀 :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버스가 우리 마을 쪽으로 와서 뭣도 모르고 탔는데, 시체 몇 구를 싣고 도로를 지나는 인력거를 봤다. 젊은 혈기에 머리가 확 돌았다. 그 길로 27일까지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에 참여했다. 어머니가 도청에 찾아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는데, 그럴 수 없다고 어머니에게 매몰차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 씻을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거다.


사회자 : 당시 어떤 상황에서 총탄을 맞았나?

장규범 : 택시를 몰고 도청 앞으로 가는데, 군인들이 총을 들고 막고 있어서 골목으로 피했다. 그러다 골목에서 총을 맞았다. 군인이 옥상에서 조준 사격했던 거다. 이상하게 다친 줄도 몰랐고, 아픈 줄도 몰랐다. 하사관으로 군대생활하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될 때라 처음에는 군인들이 공포탄을 쏘는 걸로 알았다. 그런데 주변 사람도 실탄을 맞았고, 나도 맞았다. 총을 맞았는데 겁이 하나도 없었다.

김재귀 : 도청을 사수하다가 26일에 트럭으로 사람들을 내려주고 돌아오는데 계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는 총을 안 맞았는데, 도청 앞에서 밤을 지새우고 보니 27일 5시 반이나 6시쯤 도청이 계엄군에 점령됐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무 졸려 잠을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군인들이 도청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항복하는 신호로 손을 들었다. 그런데 군인이 총을 쏘았고, 오른손에 총탄을 맞았다.


▲ 진희종 제주도 사회협약위원장이 사회를 맡았다.(사진=장태욱)

사회자 : 이후 생활을 어땠나?

장규범 : 일단 고향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결혼을 했는데 밤마다 자면서 비명을 지르는 날이 많았고, 가끔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동태를 살피고 갔다. 생활이 말이 아니었고, 결국 아들이 초등학교 때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을 했다. IMF 외환위기 때 자포자기 심정으로 3만원 들고 제주도에 왔다. 처음에 선과장에 취직해 일을 했고, 다음엔 공사판에 노무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지금 아내를 만나 재혼도 했고,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사업체도 운영하게 됐다. 제주도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지금 아내는 5.18 부상자가 뭔지도 모르는데 내가 밤에 비명을 지르니 깜짝 놀란다. 술을 안 마시고는 잠을 못 자는데, 지금 아내가 잘 참아줬다.

김재귀 : 국군통합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군사재판에서 1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병원에 있었다. 재판에서 최하 3년, 최고 5년 형을 받고 교도소로 넘어갔다. 교도소를 나온 뒤에는 학교도 잘리고, 취업도 안 됐다. 공장에 취업했는데, 이상한 사람이 다녀가면 사장은 ‘더는 안 되겠다’라며 날 해고했다. 어쩔 수 없이 ‘노가다’ 생활을 오래 했다. 저녁에 잠을 못 잔다. 1992년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와 갈라섰다. 트라우마센터에서 치료를 받는데 치료가 안 된다. 꿈에 나를 잡으러 온 군인들이 보인다. 술을 먹으면 겨우 자는데, 새벽 3시나 되면 깨어난다. 그러면 또 술을 마셔야 한다. 친구가 고양이를 키우면 좋다고 해서 2년째 키우는데, 조금 위안이 된다.


▲ 김재귀 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총을 들고 시민군으로 참여했다. 총상을 입은 후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주에서 겪은 트라우마로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사진=장태욱)

두 사람은 당시 광주에서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자살을 한 동료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가 겪은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신 반복돼서는 안 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가 역사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김행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호남지부장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김 지부장은 연대사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5.18민주화운동과 6.10민주항쟁은 서로 뜻이 상통한다”라며 “숭고한 민주정신을 이어받고 헌법에 5.18정신과 6월정신이 수록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서귀포 6월 사업회와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는 역사적 관점에서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제주4·3을 이해하고 조명하기 위해 서로 연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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