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수 한 쌍이 3초 후엔 500마리, 엄청난 번식으로 세상의 주인"

정세호 박사 11일 김만일 기념관에서 ‘숲과 곤충’ 강연회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관이 11일 오전, 기념관 영상실에서 제 5차 제주자치와 함께하는 문화프로그램을 열었다. 제주도 민속자연사박관장을 역임한 정세호 박사가 ‘숲과 곤충’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정세호 박사는 곤충은 머리-가슴-배 등 세 부분으로 나뉘고 다리가 3쌍인 동물을 의미한다며, 거미처럼 다리가 4쌍인 동물을 곤충이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정세호 박사가 곤충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사진=장태욱_


곤충은 지구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동물이라 사실 지구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곤충이 지구상에서 번성하게 된 이유로 ▲환경 변화에 잘 적응했고 ▲날개를 가졌으며 ▲생식기관이 발달한 것을 들었다.

정 박사는 곤충이 진화과정에서 몸집을 줄여 기초대사량을 줄인 것을 환경적응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했다. 호남고속도로를 개발하던 도중에 발견된 1억 년 전 화석에서 길이 76㎝ 잠자리가 발견되기도 했다며, 과거 대형 컴퓨터가 하던 일을 지금 작은 스마트폰이 하는 것과 비슷한 변화가 곤충의 진화에서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곤충의 생식기관에 대해서는 “과실파리는 1년에 25차례나 알을 낳는다”라며 “과실파리 한 쌍이 교배를 시작하면 1초 후에 100마리, 3초 후에 500마리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 정세호 박사(사진=장태욱)

영국 동양함대 소속 사마랑호와 미국인 동물학자 앤더슨과 통역 이치가와, 석주명 박사 등 제주도 곤충을 조사해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례도 소개했다.

■ 사마랑호
영국 동양함대 소속 사마랑호는 1845년 6월 제주도 동쪽 우도에 도착해 그곳을 기지로 삼고 제주도와 거문도를 오가며 수로를 측량했다. 당시 배에 탔던 장교 애드워드 밸쳐는 당시 활동을 기록한 사마랑호 탐험기를 남겼다.

정세호 박사는 그 배의 의사였던 애덤 아담스의 활동을 소개했다. 그는 제주도에 서식하는 곤충 가운데 제주홍단딱정벌레, 하늘소류, 사슴벌레류 등을 포함해 19종을 포집해 친구에게 전했는데, 그게 오늘날까지 영국에 표본으로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 앤더슨과 이치가와

미국인 동물학자 말콤 앤더슨(Malcolm P. Anderson)은 1905년 8월,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의 포유동물 포획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 이치가와 상키(市河三喜)를 동반하고 한라산의 동물과 곤충을 조사했다.


▲ 말콤 앤더슨 일행이 포유동물과 곤충을 조사하기 위해 한라산에 오르는 여정을 설명하는 장면(사진=장태욱)

이들은 능화동 주변에 캠프를 차리고 한라산에 올라 동물을 조사했는데, 이키가와는 한라산에 서식하는 곤충을 조사하고 표본을 남겼다. 당시 이치가와가 조사한 잘록허리왕잠자리, 된장잠자리, 좀집게벌리, 검은테팔랑나비, 배짦은꽃등에 등 많은 곤충이 북해도대학 박물관에 전시됐다.

정세호 박사는 이치가와가 남긴 기행문을 따라 이들의 여정을 추적해봤다며, 구한말 외국 학자가 남긴 제주도의 풍경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 석주명 박사


석주명이 전국을 돌며 나비를 조사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석주명이 제주도를 조사해 남긴 업적은 생물학 범위를 넘어 자연과 민속, 언어 등 모든 영역에 미친다.

1943년 4월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이 개장되면서 책임자로 부임한 후 1945년 5월까지 제주의 자연, 언어, 역사, 민속, 인구, 문헌 등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8.15해방 직후 총서로 6권을 책으로 출간할 계획을 세우고 제1집 제주도방언집(1947),제2집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인구론 )(1949),제3집 제주도문헌집 (1949) 등을 출간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예기치 못한 일로 세상을 떠났다. 제4집 제주도수필(제주도의 자연과 인문),제5집 제주도곤충상,제6집 제주도자료집 등은 누이동생 석주선이 노력해 유고집으로 출간했다.


▲ 김만일기념관이 11일 정세호 박사를 초청해 제 5차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다.(사진=장태욱)

정세호 박사는 민속자연사박물관에 근무할 당시, 석주명 선생 흉상을 건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서귀포시가 석주명 선생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영천동에 석주명 선생이 심은 동백나무가 남아 있는데, 나무 주변에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도록 행정이 방치하고 있다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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