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숲속에 '불칸터', 산으로 숨은 피난민들은 왜 하필 여기로 들어왔나?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㉗] 남원읍 한남리 궤영곶화전

궤영곶은 그 뜻이 분명하지 않으나 ‘궤엉곶’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근 하천 ‘홋긋내’, 즉 한남리 물오름 서쪽에서 다래오름(거린악, 큰거린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 북쪽으로 흘러드는 하천에 궤와 엉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곶 지역에 거주했던 화전민은 3∼4가구였다.

한남리 1650번지에 송여(흥)원이, 1652번지에 변완〇이, 1653번지에 정영호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중 송 씨 집안 집터는 현 씨 집안의 쌍묘 터로 변했다. 이곳과 관련해 한남리 고〇수(1938생)는 부친이 피난하던 시기에 현〇호의 언니가 묘터에 사는 걸 봤다고 전했다. 이로 보아 송 씨 집안 집터는 토지조사사업 이후 현 씨 집안 소유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인근 두 집터, 한남리 1651, 1652번지는 훼철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653번지는 올레길 형태와 밭 울담은 보이는데 집터는 조림 등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궤영곶화전에 남은 집터(사진=한상봉)


이와 별도로 한남리 1653번지의 동쪽 4시 방향 270m 지점에 있는 삼나무 숲 안에는 대나무 군락이 있는 화전 집터가 남아 있다. 지적측량이 되기 이전에 사람이 살던 곳임을 알게 한다. 굴치에 살았던 현 씨 후손은 할아버지 시절에 살던 지역이 궤영곶이라 증었했는데,  그런 증언에 비추어 봤을 때 이 집터는 현 씨들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된다.


이들 화전민 집터 주변에 작은 텃밭 정도의 화전 울담만 있고 인근에서 숯가마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궤영곶화전은 숯과 나무, 목기를 만들거나 목축을 하면서 살던 곶화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화전 집터의 앞에서 사려니오름 사이 중간지는 평지인데, 여기에 목축담으로 보이는 긴 돌담이 보인다. 아마도 목축이 성행한 화전마을이었을 것이다.


▲ 지번이 없는 화전집터와 피난민터(사진=한상봉)

참고로, 이들 화전마을 집터의 북측 ‘홋긋내’ 사이에는 ‘고냉이된밭’이란 자왈 지역이 있었다.(자왈은 가시자왈의 줄인 말이다.) 이 ‘고냉이된밭’은 제주4·3 때 한남리에서 온 많은 피난민이 숨어 살았던 곳이다. ‘고냉이된밭’과 이웃한 궤영곶화전에도 돌로 조성한 여러 피난터와 그릇 파편이 발견된다. 화전민이 살았던 곳으로 피난민들이 몰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중산간 마을 주민과 화전민들이 장작, 숯, 쟁기, 솜비줄 등의 재료, 상산방목 과정을 통해 서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에 중산간 마을 피난민이 이곳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이외 화전 지역임을 알게 하는 지명이 있다. 필자는 『한라산의 지명 : 2022』에 제1횡단도로 동수교 다리 서쪽 약 450m 지점 ‘오동이’에 고 씨 집안의 선묘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곳 비문에 ‘화덕거작지원(火德巨作之員)’란 글귀가 보인다. 화덕거는 ‘부데기’의 한자어인데, ‘부데’는 ‘불을 처음 놓다’라는 뜻이고 '거'는 '케왓'인 밭을 이른다. 즉, 부데기는 불을 처음 놓아 화전밭으로 이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례리 후손 고 씨 집안에 확인해 보니 이곳은 증언자 고조부의 묘로, 예전부터 불칸터로 불리었다고 했다. 이 높은 곳까지 화전을 일구러 사람이 있던 것이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