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오름 남서쪽 가시리 3795번지 화전은 지금 숲이 우거졌는데, 일제강점기엔 풀밭에 접해 있었다. 이곳의 동쪽 약 50m 거리엔 돌담 집터와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마당 흔적과 산전 울담이 주변에 남아있다. 양하가 자라고 있어 과거에 사람이 거주했던 곳임을 알려준다.
■가시리 영아동화전영아동화전은 표선면 가시리 3727, 3730번지 언덕 일원에 있었던 목장화전이다. 목장길이 신흥리와 이어져 있어서 주민들은 신흥리 마을과 교류가 많았다. 1918년 제주지형도에 집 8채가 보이는데 1945년 항공사진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해방 전후
가시리는 하잣 위로 물찻오름 인근까지 목장과 산림을 이루고 있다. 물찻오름은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잣담이 서로 경계를 이루는 만큼 가시리 목장과 산림은 드넓다. 화전민들은 드넓은 목장과 산림을 무대로 여러 곳에서 목장화전과 산간화전을 일구며 삶을 영위했다. 이 가운데 녹
진펭이굴 화전은 지금 사이프러스골프장 4홀과 6홀 사이 냇가 일원에 있던 마을이다. 진펭이굴의 설촌에 대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일제강점기까지 10여 호의 주민이 살다가 1945년 해방될 때 3가구가 남아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도와 1948년 항공사
앞서 화전지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제주 화전이 어느 특정한 고지나 경관 지역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음을 명칭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그 구분에 정확한 기준은 없는 실정이다.
색달동 냇서왓은 1948년 항공사진에선 40채 내외의 집들이 보인다. 이로 본다면 냇서왓은 위쪽 모라이오름 ‘빌레흘’ 화전민들이 이주해 살았을 가능성이 있고, 인구가 자연적으로 증가하고 자녀가 분가하는 과정에서 집이 늘어났을 수도 있다. 냇서왓 출신 김〇열은 제주4·3
일제는 1918년 을 공포하고, 이를 바탕으로 1919년에는 임야정리조사를 실시했다. 1921년엔 관변단체 ‘조선산림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합 수는 전국적으로 1344개였는데 조합은 산림보호, 조림, 이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무등이왓. 제주도에서 4.3의 피
남원읍 신례리 마을 산간에 이생이오름(이승악)이 있는데, 1918년 지형도에는 오름 북동쪽에 여러 화전민의 집이 보인다. 이곳에 살던 김씨 집안은 신례리 2170번지 화전 터에 대한 세금을 지금도 내는데, 토지세가 2500원이라고 했다. 선대의 가계도를 보니 한경면 신
제주도 화전민은 일제가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1906년 이후 급속히 줄었다. 1911년에 산림령이 발효되고,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일주도로가 개설됐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15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이, 1918년에는 임야조사사업이 시행됐다. 일제가 추진한 이런
갑오개혁 이후에도 제주목장은 10소장 자체가 폐장된 것이 아니라 운영되고 있었다. 10소장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화전민이 거주하며 각종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인이 남긴 기록으로 확인된다.▲ 상문리 화전민 터(사진=한상봉)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여세를
1700년도 초반 경작할 토지를 찾아 목장에 들어오기 시작한 화전민들은 1800년대 들어서자 관영목장 밖으로 이동해 터를 잡았다. 목장세 부과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10소장 안에서는 목장경작세를 내야 했지만, 10소장 상잣 위 지역으로 이동하면 목장세를 피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만주로 들어가 간도 땅을 개척하는 조선인 수가 크게 증가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화전민이 목장이나 산간으로 이주해 화전을 일구는 시기는, 한반도 북부에서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만주 땅을 일구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 무등이왓 중퉁굴. 임술년 제주민란을 주도했던 강제검은 안덕면 무등이왓 출신 화전민이다.(사진=한상봉)18세기 말부터 제주관아는 재정은 빈약해졌다. 관아는 19세기에 들어서자 화전에 대해 세금에 부과됐다. 화전세는 정해진 세율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일반적으로 지방관
▲ 고빼기화전에 남아 있는 도기편(사진=한상봉)화전은 그 위치에 따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 고잡화전(花前火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목장화전과 산간화전에 대해 전편 기사에 소개했다.고잡(花前)화전은 숲과 가까운 곳에서 산전을 개간해
▲ 도순동 '구머흘' 화전봉덕. 구머흘은 대표적인 산간화전 터다.(사진=한상봉)조선후기 대기근이 반복됐고,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경작할 땅을 찾아 목장지대로 사람이 몰렸다. 조선후기 화전이 늘어난 이유인데, 화전은 그 위치에 따라 목장화전(牧場火田), 산간화전(山間火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