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화전마을 찾아다닌 집배원, 집 한둘 아니었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㉚] 남원읍 위미리 감낭굴화전(3)

앞선 기사에서 한림읍 명월리에서 위미리 감낭굴화전으로 이주한 양 씨 집안에 대해 언급했다. 명월리 출신 양정이 신도리로 이주한 후 그의 아들 양기길이 두 아들 지현, 명현을 데리고 감낭굴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양지현은 신도리로 돌아갔고, 양명현은 위미리에 정착해 한종, 정춘, 경생 등 세 아들을 낳았다.

이중 양경생은 3·4임반 표고밭을 운영했고 위미리 이장을 여러 번 역임했다. 양경생이 표고버섯을 운영하며 큰 돈을 벌었는데, 위미리 사람들 가운데 돈을 벌기 위해 사려니오름 위쪽에 위치한 표고장으로 가는 이들이 많았다. 양한종의 아들 양O국이 이르기를, 자신이 어릴 때 보니 나무로 건조장에 불을 피워 표고를 말렸고 센도라 불리는 총감독이 이 일을 담당했다.


▲ 감낭굴화전에 남은 돌담(사진=장태욱)

감낭굴 옛 화전터 서남쪽 작은 능선에는 양 씨 집안이 산신당(山神堂)으로 모시던 당이 있었다. 지금은 개발로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사냥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던 당이었다.

당이 있던 곳을 ‘당동산’이라 불렀는데, 양 씨 집안은 일제강점기에 위미리로 이주할 때 이 산신당을 모셔와 위미리 2598번지(현 귤림선과장) 내 남쪽 사스레피나무가 있는 머들 앞에 모셨다. 기존에 있던 당이었으나 이곳에 산신당을 모셔와 양 씨 집안에서 당을 관리하고 이용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언덕을 지금도 위미리에선 ‘당동산’이라 부르니, 이 산신당에 유래하는 지명이다.

집안에 궂은일이 있으면 감낭굴화전에서 옮겨온 당에 제물을 차리고 심방을 데려와 굿을 했다고 한다. 양O국은 자신이 결혼 직후에도 굿을 했다는데, 이후 주변에 절(寺)이 생기자 신(神)에게 비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절이 생기기 전에는 년 1회 정도 꼭 가서 가내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 양 씨 집안이 감낭굴화전에서 옮겨온 당. 이 당이 있어 일대 지명이 '당동산'이다.(사진=한상봉)

위미리 4576번지에는 강대은(姜大殷)이 살았음이 토지조사 때 작성한 지적원도에 보인다. 강 씨 집안은 본래 전라도 출신이다. 선대 강재헌(姜在憲)이 전라남도 나주군 공산면 금곡리에서 제주로 이주했으며 묘소는 위치가 불명확하다. 금곡리에서 태어난 해는 1715년이며, 슬하에 3형제를 낳으니 연회(淵會), 응복(應福), 응연(應連) 등이다. 자식을 낳거나 데리고 제주에 왔다면 1750년도 전후로 볼만하다. 이 중 큰아들 연회의 묘비에는 제주도에 들어와 조천읍 북촌리에 거주하다 위미리로 왔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본다면 늦게 잡아도 1800년도 중반 감낭굴화전으로 이주한 듯하다.


장남은 향공진사(鄕貢進士) 영렬(永烈)로 아들이 없자 형제의 자식 명원(明元)으로 대를 이어 2남 5녀를 낳았다. 강명원이 살던 집은 스프링데일 골프장 동쪽 위미리 4579번지이며 4577번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실이 1914년 지적원도에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 즉, 강명원의 집과 아들 대은의 집이 지적원도에 보이는 것이다. 명원의 아들 대은은 기룡(琪龍) 등 5남 2녀를 낳았는데 후손들이 위미리에 거주하고 있다.

강기룡의 사위 위미리 오〇호는 장가든 후 어느 날 처가에 갔다가 장인이 뭔가 불에 태우는 장면을 봤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호구 관련 자료를 태우는 중’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귀한 자료가 불에 탄 듯하다.

오〇호는 집배원에게 들은 화전 관련 얘기도 전했다. 일제강점기에 집배원들이 화전에 배달할 일이 있으면, 산간을 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집배원이 다닌 집이 46호였다고 한다. 감낭굴화전이 사라지기 전 남원읍 화전 지역에는 46호의 화전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구당 최소 4인 가족으로 계산해도 180여 명 이상이 화전마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소려니오름 앞자락에는 화전민 두 가구가 각각 한남리 1648, 1649번지에 살고 있었다. 아쉽게도 두 가구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참고로, 1960년대 초 한남리 1648, 1649번지 일원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위미리 문〇길(1959생)은 부친을 따라 소려니오름 남쪽에 들어와 살게 됐다.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들판에 목포사람 엄경찬 장로라는 사람이 제주에서 교인들을 모집하여 총 8채의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 장로는 목포에서 과자가게(또는, 공장으로 추정)를 했기에 가지고 온 과자를 많이 먹을 수 있었는데 이때 엄 장로와 함께 소려니오름 남쪽에 들어와 살았던 교인들은 창천리 출신 부친 문갑손, 남원읍 신성동(남원1리) 오〇옥, 위미리 오〇담, 정〇〇, 현〇〇 등이었다. 오〇옥은 본래 옆 마을인 감낭굴에 살던 사람으로 이곳에도 한 채의 집을 추가로 지어 어울리며 살았다. 집은 손수 개인들이 지었으며 재배한 것으로는 메밀, 갈산듸(검은밭벼), 감자와 고구마 등이었다. 문〇길의 부친은 말 40마리를 키워 ‘고냉이된밭’이나 주변 소려니오름 인근 들판에서 키웠다. 현〇〇은 터를 늦게 잡은 사람으로 이후 남원으로 내려가 집배원을 했다.

8채 집 가운데 4채는 슬레이트로 지었다. 부친의 집은 둘로 나눠 한 칸을 교회 예배당으로 쓰고 반대쪽 칸은 살림집으로 사용했기에 통상 교회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 사는 집이다. 엄 장로의 사업은 이후 순탄하지 않았고 이 땅들을 양 아무개 씨에게 지분을 이전했다.

이곳에 살았던 오〇담(1937생)은 말하길, 미국 기독교봉사단체인 4804단체가 밀가루를 지원하면 엄 장로가 이 밀가루를 가지고 와 마을 교인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집도 4804단체의 지원에 힘입어 지은 것으로, 자신은 물이 나는 곳 아래 집을 짓고 살았다.


▲ 항공사진에 감낭굴화전 집터가 남아 있다.(사진=한상봉)

밭을 일굴 때는 콩, 팥, 메밀을 심었으나 토질이 안 좋고 곡식 재배도 안 됐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는 이곳을 개간하며 살았다.

소려니오름 앞에 살던 사람 중엔 사냥을 하거나 줄골채를 만들어 3일과 8일에 열리는 남원장에 와 파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현〇옥은 사냥을 위해 남원리에서 올라다니는 사람과 안면을 트고 있었다. 사냥할 때 종종 들리는 사람에게 어느 지점에 가면 오소리가 있을 거란 정보도 주곤 했다.

이외에도 화전으로는 위미리 산1-1 남쪽 경계 국림담 북쪽 ‘독모르’에도 있는데, 어느 시기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집터의 돌확과 집터 돌담만이 화전 터임을 알게 하고 있다.


▲ 독모루 돌확(사진=한상봉)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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