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피해 화전 들어간 천주교인 가족 운명은?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⑳] 남원읍 수망리 장구못 주변 화전

<앞선 기사에 이어>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에 살았던 양씨 집안, 고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제주4.3 당시 화전민들은 토벌대에 피살되고 가옥은 무장대의 식량보관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망리 현경생(1929생)은 일제강점기에 부친이 구장이었는데, 장구못화전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원면에서 검은 비누, 고무신, 석유 등 생필품을 배급했는데 구장이 그걸 나눠주는 중심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남원면사무소로 가서 배급품을 받아 구장 집으로 가져오면, 구장은 반장들을 통해 주민들에게 이를 나눠졌다. 장구못화전 주민들도 석유를 받기 위해 수망리로 내려왔는데, 현경생은 장구못 화전 주민을 목격했다고 한다. 장구못 고 씨 집안 사람이 수망리로 내려와 배급품을 가져갔고, 화전민의 아내는 수망리에서 노루고기를 팔고 보리쌀로 바꿔 갔다 한다.

장구못 아래 수망리 1033-2, 3, 4번지에도 화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민오름 북쪽 길가 옆에 화전 집터란 푯말이 있는 곳인데,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토지조사사 원적부나 1918년 제주지형도에는 집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48년 항공사진엔 집 흔적이 보인다. 『수망리지』에는 장구못과 관련하여 해방 전 고 씨와 조 씨 등 6∼7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기록됐는데, 조 씨는 장구못 아래, 민오름 북쪽에 살았다.


▲ 장구못 아래에 남아 있는 집터(사진=한상봉)


조 씨 집안은 대정읍에서 이주한 후손들로 3형제 중 첫째와 셋째 아들이 천주교 신자라 ‘이재수의 난’과 관련해 박해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신자가 아닌 둘째 아들이 박해를 피해 하례리 ‘벵듸왓’으로 숨어들었다. ‘벵드왓’은 제1횡단도로 아리랑 고개에 위치했던 목장 화전지다. 이후 ‘벵듸왓’에서 다시 민오름 북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자녀로는 4남매가 있었고, 딸 2명은 수망리 김 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김 씨 집안 후손의 증언으로 조 씨 집안과 관련한 사연이 확인됐다. 수망리로 시집간 딸은 조〇생의 동생이 된다. 이로 본다면 민오름 북쪽의 화전민은 1918년 이후 ‘벵듸왓’에서 넘어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1918년 지도에는 나타나질 않는다. 수망리 조〇생의 며느리에 따르면 시어머니가 생전 말하기를 마은이오름 뒤로 올라 화전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마은이오름 뒤에는 화전 터가 있다.

장구못의 서쪽 수망리 1027∼1032번지에는 김, 이, 박, 신 씨가 살고 있었는데, 해방 무렵엔 한 가구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〇능(1930생, 민오름 서쪽 ‘굴치화전’에 거주)은 김창국이란 사람이 이 일대에 살았는데, 모친의 일가라고 했다. 이로 본다면 1028번지나 1029, 1032번지에 살았던 주민 가운데 한 가족의 후손이 김창국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돌방아가 확인됐고, 화전민 집들끼리 이어지는 ‘속구린질’ 올레도 남아 있다. 인근 화전 사람들이 모여든 곳임을 알 수 있다.


▲ 장구못 서쪽에 남아 있는 돌방아(사진=한상봉)

김〇능은 어릴 때 불이 없으면 남동생과 함께 장구못 섯동네 김 씨 집 부엌으로 가서 불을 빌려왔다고 했다. 장구못까지 거리는 멀었으나 당시 길은 고사리밭이고 소로라 다닐 수 있었다. 불을 빌리러 간 집에는 동갑 또래의 남자 어린애 2명과 부부가 살고 있었고, 또래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불 빌리러 왔다며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을 빌리려면 종나무의 썩은 속을 파서 만든 ‘불찍’이 필요했는데, 이걸 구하기 위해 멀리 물오름을 오르기도 했다. 불찍에 불을 붙이고 화승이나 대나무통에 담아 가지고 오면, 불씨를 살려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김 씨가 인근 화전마을의 김 씨에게 불을 빌려온 데서, 화전민들끼리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서로 교류하고 의지하며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구못의 동쪽에는 전두칠, 고행길, 강〇〇, 김행갑 등이 살고 있었다. ‘진구술’ 목장에서 마은이오름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가 목장 지역으로 수망리 1043번지 일원이다. 지금도 고행길이 살았던 집터(1043번지)와 주변 대나무밭이 남아 있다. 이들이 어디로 이주했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 장구못 동쪽에 남아 있는 집터(사진=한상봉)

고〇〇은 ‘진구술’ 목장 인근 화전 사람들은 가시자왈을 태워 그 자리에 메밀과 팥 등을 재배했다고 진술했다. 1950-60년대엔 목장을 둘로 나누어 간장(間場)담을 쌓아 우마를 돌아가며 풀을 먹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풍력단지로 변모했다고 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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