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가옥이 무장대 식량 보관처, 고 씨 집안의 기구한 운명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⑲] 남원읍 수망리 장구못화전

수망리에는 목장화전과 곶화전, 고잡(고지앞)화전 등 세 종류의 화전이 모두 있었다. 국림담의 위쪽 숲을 ‘치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국림담 아래 ‘진구술’ 목장의 풍력단지 외에는 대부분 나무가 자라 자왈과 곶으로 변하고 있다.
목장화전 지역으로는 수망리 1027~1044번지 해발 400m 고지 선상의 ‘장구못’화전, 1048~1054번지 사이의 ‘따비튼물’화전이 있었다. 또, 수망리 1055번지와 1056번지의 ‘구진다리이모르’화전, 1057~1071번지에 위치한 ‘먹고흔모르’화전(먹모르화전)이 있었다. 수망리 마을지에도 이곳에 화전민이 살았을 것이라고 기록됐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도 화전민 집 표시가 보이나 이 지도는 수망리 지역 지형도에 오류가 보인다. 물영아리오름을 민오름으로 표기하고 있고 묵지(墨旨)라 표시된 ‘먹모르’화전을 ‘장구못’ 위치에 표시해 지도를 이해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1948년 항공사진에선 수망리 화전 대부분이 사라지고 ‘장구못’과 민오름 뒤에만 사람이 살고 있음이 보인다. 특히, 곶(숲) 안 화전민이 사라진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조림지에서 화재를 예방하려고 화전민을 내몬 영림서의 행정조치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화전민 지역에 살았던 양〇석이 수망리 주민에게 말을 전해준 구술내용이 남아있다. 수망리에서 목장과 산림지를 구분하는 ‘치름담’이라 부르는 국림담(영림소담)이 1930년 이후 조성된 점을 고려하면, 그나마 존재했던 숲 안의 화전민들은 화재에 대한 우려로 일시에 국림담 안에서 내몰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마스다 이치지는 1939년 발표한 『제주도의 지리학적 연구』에서 먹모르화전이 한남리에서 올라온 일족들이 세운 화전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마스다 이치지는 이 책에서 먹모르화전에 4호, 장구목화전에 12호가 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앞의 기사에서 필자는 이들 화전이 주변 아랫마을이 아닌 제주도 다른 지역에서 이주했음을 살펴본 바가 있다. 수망리도 비슷하게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하여 고립경제 생활인 화전을 일궜기에 마수다 이치지의 화전민 이주 기록은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 수망리 화전분포


 ■ 장구못 화전

장구못화전은 의귀리 진구술목장에 장구처럼 생긴 연못을 중심으로 주변에 화전민이 살았던 지역을 이른다. 민오름 뒤 풍력단지로 이어진 길을 따라 약 900m 가면 승마장을 운영하는 집이 나오는데, 이곳이 옛 장구못화전의 중심지다. 수망리 1035번지 화전 집터에서 동쪽 90m 거리에 장구못이 있는데, 못 옆에 돌담을 두른 곳은 사람이 이용했고 넓은 곳은 우마가 이용했다. 『수망리지』에 실린 사진에는 이 장구못을 ‘따비튼물’이라 하고 산 171번지라 잘못 설명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장구못과 가까운 수망리 1033~1035번지에는 고운방, 고운흥, 고운만이 살았고, 1039번지엔 고운방이 살았다. 이 네 사람은 모두 형제지간이었다. 수망리 1036~1040번지 사이에는 양 씨 가족과 이름 확인이 안 되는 5가구가 살았고, 장구못 서쪽 수망리 1027~2031번지에는 신득〇, 김윤옥과 김윤〇 형제, 이산방이 살았다. 그렇게 12가구가 장구못 주변에 모여 살며 화전을 일궜다.


▲ 의귀리 진구술목장에 장구처럼 생긴 못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화전마을이 형성됐다.(사진=한상봉)

  일제강점기 12가구, 해방 무렵엔 3가구.. 제주4.3에 치명적 피해 입고 사라져 


앞서 소개한 『제주도의 지리학적연구』에는 당시 장구못에 거주하는 가구 수를 12호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웃한 먹고흔모르(墨旨:먹모르)엔 4호가 있다고 하고 있다. 위 기록을 참조하면 1914년 이후 가구원의 분화와 이주가 있었지만 1939년 이전까지는 12가구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48년 항공사진에는 장구못에 집 3채만 남았다. 일제 말기와 해방 기간에 급속히 화전민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수망리나 의귀리 지역에서 확인해 보니 양〇석, 고〇〇과 다른 한 가족 등 3가구가 살다가 제주4·3 당시 소개되었다고 한다.

양〇석 후손의 며느리가 전하길 조상 묘가 육지에 있어 형제들끼리 골매드리(번갈아 가며)며 소분(벌초)을 다녀왔다고 한다. 위미리에 거주하는 딸은 부친 양〇석이 진구술목장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해줬다고 전했다. 남원리에 사는 직계 후손은 고조할아버지 시절 전라남도 강진군 진천면에서 장구못으로 이주했으며 할아버지가 양갑손이라 했다. 할아버지가 살던 곳을 1914년 원적부로 확인해 보니 수망리 1037번지였다. 양갑손은 제주4‧3 당시 총에 맞아 숨졌다. 수망리 주민이 전하기를, 양〇석은 신체가 큰 사람으로 말을 타고 우마를 몰아 목장으로 가는 것을 자주 봤다며 물찬(물찻)오름까지 소를 올려 목축을 했다고 한다.


 전남 강진 출신 양 씨 집안, 구좌 평대 출신 고 씨 집안 오래 전 들어와 화전 일구다 큰 화 입어

의귀리에 거주하는 고〇〇은 자신의 선대가 장구못에 살았으며 목축과 피, 메밀 등을 재배했다고 한다. 고〇〇의 구술에 따르면 할아버지 고운방과 형제들은 제주4·3 직전 마을로 내려왔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진구술’ 목장에 땅 72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화전 집 주변 3정보를 마을공동목장조합(조합원 52명)에 돈을 받고 넘겨주며 매도하는 땅 3정보를 구분해서 등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매도와 매수에 관여한 사람이 모두 죽은 후에도 돈을 주고받은 흔적은 남아 있어, 72정보를 한꺼번에 목장조합으로 팔아넘긴 것처럼 됐다. 화전민 고 씨 집안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을 겪었다.


위 고〇〇의 부친 고운방은 수망리 1039번지에 살았으며 족보를 확인해 보니 선대가 평대리-가시리 안좌동-토산리-장구못으로 이동했던 게 보인다. 부친 고운방-조부 고명관-증조부 고창의-고조부 고익윤으로 이어지는데, 고조부의 묘가 수망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장구못 화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다. 고〇〇의 태어난 시기와 선대 고조부까지를 역산하면 적어도 1800년대 초반 장구못에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〇〇은 제주4‧3 당기 부모, 형, 누나, 여동생 2명과 함께 국림담 인근 ‘엄실이’로 피신한 후 돌담을 두르고 숨어 살다 형이 토벌대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가족이 시신을 가매장한 후 5년 뒤에 옮겨 정식 묘를 썼다고 한다. 귀순 시에는 ‘진구술목장’에 진을 친 2연대 군부대에 귀순했는데, 음력 2월이었다.


▲ 진구슬화전에 남은 집터 흔적(사진=한상봉)

이 이전 1948년 말 수망리가 불에 타기 시작하자 김〇탁(1934생)은 14살에 토벌대를 피해 목장으로 도망갔다. 동네사람 현〇길 등 3~4명도 장구못으로 도망갔는데, 이들이 장구못에 도착해보니 집이 4~5채가 있고 집안에는 쌀, 보리, 팥 등이 가마니에 쌓여 있었다. 식량을 옮기는 사람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니 “알 것 없다”는 얘기가 되돌아 왔다고 한다. 장구못 화전 집터에 식량이 있었던 이유는 산사람(무장대)들이 마을에서 약탈하거나 얻어온 것들을 임시 보관했던 것이다. 이후 저녁에 집에 와보니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불에 탔고 해안 마을로의 이주하는 소개행령에 참여했다.

<다음 편에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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