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마을로 들어온 피난민 “볼레만 먹어 똥이 붉은 색”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㉒] 남원읍 수망리 먹고흔모르(먹모르)화전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과 따비튼물화전과 구진다라이화전 등에 대해 기술했다. 장구못화전에는 이재수의 난 때 화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인 가족도 있었고, 구진다라이오름엔 4.3 때 집이 불타고 목숨이 위험에 놓이자 조상 묘 주변에 굴을 파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화전민의 사례도 있었다.

수망리에 속한 화전 가운데 먹고흔모르화전이 남았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표고장을 조성했던 곳이다.

■ 먹고흔모르(먹모르)화전

속칭 ‘어욱장’이라 불리는 화전민 지역으로 수망리에 속한 화전 중에서도 가장 위에 위치한다. 수망리 ‘한모르’에 위치한 화전을 포함한다. 한모르에 해당하는 수망리 1057∼1059번지에는 안씨 집안 사람들이 살았으며 ‘어욱장’인 1060∼1071번지에는 고연정, 고원〇, 고창주, 김지〇, 문경석, 양영복, 문경송, 문선송 등이 살았다.
‘한모르’ 지역에 살던 안씨 집은 4년 뒤인 1918년엔 일본인 사업가 사토우(佐藤)에게 넘어갔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에 안씨들이 살던 집 세 채가 표고장으로 쓰이는 게 보인다. 안씨 집안이 화전터를 팔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든지 아니면 표고장에서 고용돼서 일을 했을 것이다. 사토우란 인물은 『일본인이 조사한 제주도』에 이름이 보이는데, 1928년 도사(島司) 일행과 한라산 석판로(성널오름길)를 넘어 서귀포로 갈 때 등장하는 인물이다.
참고로, 제주 최초의 표고장은 일본인 여행가가 남긴 그림지도 『제주도여행일지:2016』에 기록이 담겼는데, 일본인은 서귀포 산간 세 곳에 표고장을 조성했다. 그 해가 1905년도이니 그 이전에 대한제국으로부터 산림을 불하받은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통감부에 압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이들이 이용했던 ‘한모르’ 화전지에는 지금도 당시의 집터가 남아 있다.


▲ 수망리 먹고흔모루화전에 남은 집터(사진=한상봉)

한모르화전보다 위에 해당하는 수망리 1064∼1071번지 지역은 ‘어욱장’이라 하는 곳으로, 과거 초원이었으나 조림을 통해 숲으로 변한 곳이다. 1067번지는 훼손된 집터와 산전 울담이 보이고, 1065번지에는 가운데 화장실을 두고 집 두 채가 있다. 1068번지는 훼손된 상태며, 1069번지는 산전만 남아 있다. 이웃한 1070번지와 1071번지에는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던 집 6채가 남아 있다.

이 집터에선 봉덕과 깨진 그릇 조각이 보인다. 봉덕은 천정에 거는 고리를 이용해 곡식을 말리는 장치다. 보통 산속은 가뭄은 덜 하지만 습기가 많아 곡식을 거두면 빠른 시기에 고리를 천정에 걸어 아래서 불을 피워 말려야만 했다.

해방 이전엔 풀밭이라 ‘어욱장’이라 불렸던 이곳엔 고, 문, 양씨 일가가 있었으나 해방 전 어디로 이주했는지 확인이 안 되고 있다. 이들이 떠난 풀밭은 가시자왈이 되어버렸고 1948년 항공사진엔 하얀 부분으로 보이고 있다.


▲ 먹고흔모루 화전 집터에 눈이 쌓인 장면(사진=한상봉)

이 가시자왈 지역은 제주 4·3 때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어 먹을 게 없는 피난민에게 보리밥나무(볼레낭) 열매를 맺혀 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의귀리 강 아무개는 이곳에서 숨어 살 당시 보리밥 열매로만 연명했기에 변이 붉은색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가시리 현 아무개도 물찬오름 인근에서 보리밥 열매를 따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는데, 교래리 소공원 인근 2연대 주둔지로 귀순하는 도중 엄마가 죽은 줄 모르고 엄마 곁에 있던 아이를 보고도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며 울먹였다.

‘어욱장’ 인근에선 피난민들이 사용했단 항아리 조각도 발견됐다. 교래리와 가시리, 수망리, 한남리 산간지역은 제주도 최대의 4‧3 피난민 지역이었다. 화전민 집터들은 이 피난민들에게 거주처가 됐다. 실제 마은이오름 뒤편에선 피난민들이 화전 집터의 돌담을 이용해 다시 움집을 짓고 살았다. 마흐니숲길 ‘새커리내창(집새채와 냇가)’이라 쓰인 푯말도 실상은 집터가 아니라 피난민들이 이용했던 피난지로 돌담 규모나 구조도 화전 집터와 다르다. 수정이 필요한 부분으로, 돌담지 인근엔 피난지 여러 곳이 남아 있다.


▲ 수정이 필요한 세거리 내창 안내표지(사진=한상봉)

이외에도 마은이오름 북쪽 12와 1시 방향 400m 지점에도 지번이 부여되지 않은 집터가 있는데, 그곳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린다.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화전민이 이용했던 땅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수망리 화전민들은 집 주변에 산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소유 경작지가 지적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시리나 신흥리 화전과 다른 점인데, 수망리 화전민들이 산전을 등기하지 않고 집터만 등기한 이유가 궁금하다. 화전민들이 세금과 관련하여 등기신청을 단체로 안 한 건 아닌지, 혹은 일구던 땅을 버리고 다른 곳을 개척해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수망리에는 화전민 40여 가구가 여러 지역에 걸쳐 생활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4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120여 명이 목장과 곶(숲)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