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리 머체왓화전, 거기에 큰 부자 화전민 살았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㉓] 남원읍 한남리 머체왓화전

남원읍 한남리는 제1횡단도로 변 물오름(동수악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과 궤펭이오름(주차장 옆)을 경계로 남동 방향으로 이어진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로 소낭당내(松木堂川:서중천로 불리는 내)가 흐르는데, 이 내(川)의 동쪽과 서쪽으로 상잣 위 중산간 목장지대에 목장화전이, 국림담 넘어 소려니오름 북쪽에는 곶화전이 있었다.


목장 화전으로는 머체왓화전, 굴치화전, 소려니(사려니) 화전이 있었다. 이중 소려니화전은 본래 위미리 감낭굴화전에 속했던 지역인데, 1914년 토지조사 사업 시 한남리로 지역이 변경된 곳이다. 1918년 「제주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는 ‘수악동’이라 표기됐는데, 수악동화전은 수악 동쪽에 있던 신례리 화전민 지역이다. 1918년 지도는 위치 설정에 문제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어르신의 구술에 의하면, 소려니오름 지역은 과거 위미리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던 곳이라 한다. 위미리 감낭굴화전 생활권과 겹치므로 감낭굴화전 설명에 포함하고자 한다. 반면, 곶화전은 소려니오름 뒤 ‘궤영곶’에 3∼4가구가 살던 화전 지역이다.


▲ 머체왓, 굴치 화전. 1948년 항공사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머체왓 화전

머들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큰 바위가 깨져 형성된 돌무더기를, 머체는 화산 바위덩어리를 의미한다. 가시리 녹산로변 ‘행기머체’를 생각하면 머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머체오름은 나무가 우거졌는데, 거기에 오르면 큰 바위 머들을 볼 수 있다.

지난 2012년 머체오름 주변에 머체왓숲길이란 이름으로 탐방길이 열렸다. 서중천 주변에 숲이 형성됐고 그 사이로 탐방로가 지나는데, 비교적 순탄한 길이어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 머체왓화전은 ‘머체왓숲길’에 있어서 접근이 비교적 쉽고 화전마을 터 정비가 잘되어 있다. 머체왓숲길을 찾는 산행객들은 멋체왓화전의 흔적까지 맛볼 수 있다.

머체왓은 머체오름 앞자락에 있는 밭(왓)이란 데서 유래했는데, 1914년 지적측량 시에 김 씨 두 가구, 문 씨, 홍 씨, 고 씨가 살고 있었다. 1918년 제주지형도에도 변함이 없다. 이후 1948년 항공사진에 집 두 채가 남았는데, 지역민은 문 씨 일가가 가장 나중까지 있었다고 전했다.


▲ 머체왓 지번과 거주자(한상봉)

1914년 이후 해방까지 거주민 변동이 있었는데, 해방 전후 지역 주민 구술에 의해 해방 무렵까지 살았다고 확인되는 화전민은 김선익, 문도일, 현완일, 홍근석 등의 가족이다. 떠나는 집안이 있기도 하고 타지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일도 있었는데, 머체왓화전 가구 수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지대라 사람들은 팥, 메밀, 지슬 등을 재배하고 목축을 했는데, 화전 동쪽에 있는 ‘물도’에서 식수를 구했다. 사람들이 한남리로 내려오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머체왓화전-느쟁이모르-절도-고남물도-한남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머체왓화전을 보면 집 가까이는 작은 밭인 반면, 집과 떨어진 곳에선 비교적 넓은 목장이나 산전을 가진 구조다. 이는 집 주변 밭에선 여름작물이나 채소 등을 재배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돼지우리의 거름이나 목장지 우마의 똥을 모아 밭 거름으로 이용해 숙전(熟田)화 시켰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목장밭은 거름을 주기가 쉽지 않으나 집 주변에 밭은 손이 자주 갈 수 있어 밭을 여러 개로 나눠 윤작(輪作)했음을 보인다.


▲ 머체왓화전, 머체왓숲길 탐방로에 있었어 접근이 쉽다.(사진=한상봉)

1914년 토지조사사업 시기 살았던 가구원을 보면 문상생, 김만종, 고사일, 홍〇〇, 김백송, 〇〇〇 등이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 씨 집안은 1645번지에 살았다. 이 이곳에 정착한 해는 확인돼지 않았다.

족보를 통해 머체왓 문 씨 집안 일가를 확인해 보면, 문유성-문융발-문태종-문수항·수명·수전 형제로 이어진다. 그중 3번째 문수전의 일가는 남원리로 이주하고, 문수항, 문수명 형제는 머체왓에 머물고 있었다. 문생원(文生元, 1873년생)은 문수항의 아들인데, 도철, 도흥, 도능 세 아들을 낳았다.

문 씨 집안 후손에 의하면, 선대는 머체왓에서 농사와 목축을 했으며 특히, 문생원은 100여 두의 소를 키우는 큰 부자로 성장했다. 남원리 사람들이 바닷고기를 팔러 머체왓 화전으로 오면 조와 메밀 등으로 바꿔가기도 했는데, 이럴 때 문원생은 곡식을 넉넉히 챙겨줬다고 한다. 화전 사람들이 결코 가난하게만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으로, 부자가 되기 위해 화전으로 간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문생원의 큰아들 도칠이 먼저 한남리로 내려왔으며 나중에 내려온 형제들은 머체왓에 머물고 있었다. 이중 큰형과 아내는 제주4·3 때 피신 중 토벌대에 의해 끌려가 학살됐고, 막내는 무장대에 의해 머체왓 화전 집터에서 학살됐다고 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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