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동부가 발행한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중 제주지형도에는 각시바위 위쪽을 기준으로 서호동 산(山) 번지가 있다. 그런데 그 일원에 화전민이 살았다는 표시가 보이질 않는다. 또한, 이보다 4년 전 있었던 1914년 토지조사사업 종료 시에도 시오름 인근엔 지
호근동의 상잣은 각수바위(각시바위) 뒤 ‘상여왓’을 지난다. 상잣에서 산록도로 너머 시오름 남쪽의 ‘치유의숲길’ 내 국림담(속칭 중원이켓담)까지는 ‘중원이케’라는 호근마을 공동목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이곳에 과거 화전민이 살았다. 지역민의 구술에 의하면 시오름 인
서홍 호적초에 보이는 가구 수로는 1896년 34호 85명, 1897년 22호 75명, 1900년 7호 33명, 1905년 7호 34명 1907년 7호가 거주하고 있다. 서홍 호적초를 기반으로 당시 생물도화전에 거주했던 주민을 추적했다.■ 3통 4호 진명송(秦明宋)교생
제주도화전은 대체로 19세기 말까지 증가하다가 일제의 산림정책,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인해 위축됐다. 서홍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1914년 토지조사사업 시의 지적원도와 서홍동 호적초를 비교해 생물도와 주변 화전이 어떤 변화 과정을 거치며 축소되었는지, 이들이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목장에 빠르게 화전이 형성된 배경을 앞서 설명했다. 관아는 목장화전 주민에게 장세와 가경세를 걷어들여 필요한 경비로 사용했다. 반면, 산림보호에 대한 재제로 곶화전은 목장 화전보다 늦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벌채와 관련해하여서는 마을에서
조선후기에 기후위기가 반복되면서 기근은 일상화됐고, 화전의 확대는 숲의 파괴로 이어졌다. 김영우의 『조선 숲은 왜 사라졌는가 : 2022』에는 숲의 파괴 과정을 담은 내용이 있다. 1500년대 임진왜란 후에는 도성 중심으로 산림이 훼손되었는데, 이
생물도를 포함해 제주도화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가 살았을까?제주에 화전이 등장하는 기록은 『세종실록』에 고득종(高得宗)이 하잣 축성 건의와 관련한 기사에 나타난다. 1430년 2월에 하잣이 완성되며 목장 안 344호를 옮겼다는 내용이다. 4년 뒤『세종실록』에는 제
서홍동 생물도 화전은 산록도로 북쪽 서홍동 2559~2564번지 일원에 살았던 화전 지역이다. 일제총독부가 제작한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중 제주지형도에 생물도(生水洞)가 보인다. 솔오름에 인접한 서북쪽 기슭에 동홍동 연자동이 있고, 그 서쪽 서홍동에 생물도가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經國大典≫에는 오가작통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조문이 실렸다.‘서울과 지방 모두에 5가를 1통으로 하고 통에는 통주(統主)를 둔다. 그리고 지방에는 5통마다 리정(里正)을,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고, 서울에는 1방(坊)마다 관
일제강점기에 서귀포시 상효동 선돌 일원에 화전민 여러 가구가 살았는데, 이들은 선덕사 동쪽 인근 언물내의 물에 기대어 생활했다. 그 밖에도 화전은 선돌선원 북쪽과 서쪽에도 분포했다.■사두석화전 사두석은 남국선원의 동쪽 상효동 산 41번지에서 아래쪽 산 69-1번지 산록
조선총독부가 1914년 토지조사를 완료하고 작성한 지적원부에는 상효리 선돌 일원에 화전 지번이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에 선돌 일원에 화전민 여러 가구가 살았는데, 이들은 선덕사 동쪽 인근 언물내의 물에 기대어 생활했다. 그 밖에도 화전은 선돌선원 북쪽에도 드넓게 분포했다
조선총독부가 1914년 토지조사를 완료하고 작성한 지적원부에는 상효리 선돌 일원엔 세 군데 화전 지번이 확인된다. 상효리 1591-1593번지다. 상효동 1593번지는 선돌 앞 황솔나무가 있는 곳인데, 황솔나무 인근에 화전 가옥이 있었다고 앞선 기사에서 언급했다.▲ 선
상효동 화전민은 산록남로 위쪽에 있던 상잣 위 ‘중원이케’와 숲 지역에 거주했었다. 『(제주동부)지역잣성유적보고서』에 따르면, 상잣은 상효동 1467∼1465번지 상효원과 골프장 경계-신효공동묘지-남록남로 도로 남측을 접하며 동쪽으로 이어진다. 이 공간에는 내가 여러
앞선 기사에서 하례리 벵듸왓화전에 살았던 김 씨와 조 씨 일가에 대해 언급했다. 이들은 두 집안은 모두 대정읍에 살다가 먼 곳으로 이주해 화전민이 됐다. 조 씨 일가인 경우 가족이 천주교이이었는데 이재수의 난(1901년)을 겪은 뒤 보복을 피해 벵듸왓으로 이주한 것으로
남원읍 하례리의 대표적 화전마을은 제1횡단도로 수악산 인근에 있던 벵듸왓화전이다. 1914년 지적원도에는 벵듸왓화전에 가옥 10채가 표시됐는데, 1918년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는 14채가 나온다. 4년 사이에 4채가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화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