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동 피난민 집단 희생된 서호동 가시왓케, 원래 화전민의 땅이었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㊿] 서호동 화전민
조선총동부가 발행한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중 제주지형도에는 각시바위 위쪽을 기준으로 서호동 산(山) 번지가 있다. 그런데 그 일원에 화전민이 살았다는 표시가 보이질 않는다. 또한, 이보다 4년 전 있었던 1914년 토지조사사업 종료 시에도 시오름 인근엔 지번을 부여받은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본다면 서호동은 화전민이 없는 지역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을 확인해보니 시오름 남쪽 ‘가시왓케’(서호동 산 2, 8, 9번지, 산 1번지 시오름 남쪽 일원을 포함한 주변)를 중심으로 화전의 흔적과 속구린질, 산전 밭이 확인됐다. 가시왓케는 호근동 ‘치유의숲길’에 있는 ‘총각산전터’의 서쪽을 이른다. 기시왓케 외, 시오름 동남쪽 기슭으로도 화전을 일궜더 돌담 흔적이 흩어져있다. 이로 본다면 토지조사 사업 이전에 화전민들이 들어와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화전민들이 산전을 만든 곳은 시오름 남쪽 ‘가시왓케’와 시오름 서쪽 냇가 서쪽 ‘서우창궤’ 인근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시오름 남쪽 ‘가시왓케’에선 잘 조성된 산전 밭이 확인되는데 ‘가시왓케’ 화전민은 동쪽으로는 호근동 화전과 서홍동 생물도화전, 서쪽으로는 후기(後記)할 판관화전, 영남동 서치모르화전과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시왓케화전지 집터에선 집터, 돗통시 및 옹기조각, 울담, 대나무, 산전과 우영밭인 돌렝이밭이 있고, 사람이 살았음을 알게 하는 양에(양하)도 확인된다.
본래 가시왓케는 서호리 주민들이 조선 말기 훈장을 지냈던 허은 선생을 위해 우마를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한 목장이었다. 지금은 곶(숲) 지역으로 변해버린 지역이다.
호근동 허○선(1966생)의 가계도를 보면 부 허○선, 조부 허○, 증조부 허영-고조부 허은으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볼 수 있다. 증조부인 허영이 이곳에서 목축을 하며 일시 거주를 했다고 한다. 허○선에 따르면 고모를 통해 증조할아버지께서가 이곳에 촐(띠)밭이 있어 이를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담을 두르고 촐를 지키기 위해 숙박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새는 집을 지을 재료였기에 우마가 침범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베어가지 못하도록 지켰으며, 쉐(소)를 가시왓케에 놓았던 지역민들은 ‘케밭장(목장밭을 관리하는 사람)’을 두어 공동관리 해야만 했다. 현재 확인되는 화전 집터는 증조부가 살았던 곳과는 가옥과 산전의 규모 등을 볼 때 일시적 거주로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어 정식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1948년 항공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집으로 추정되는 한 채의 모습이 보여, 현재 조사지와는 다른 곳에 또 다른 움막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호동 허○○(1938생)은 가시왓케 하르방(허은)은 자신의 일가 어른으로 아내인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의 집 한 칸을 빌어 살며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초석과 새끼줄을 만들었다 한다. 초석새(‘청새’라고 한다)는 가시왓케에서 많이 났다고 한다.
김○수(1932생), 김○창(1933생)은 가시왓케가 허 훈장에 의해 운영되다 고○현에게 팔렸다고 증언했다. 고○현은 마을 사람 허○배에게 3년간 관리 운영을 맏겼으며, 이후 호근동 김○배에게 ‘케파장’ 역할을 하라며 집을 짓고 살게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일이다.
가시왓케에선 세 곳에서 화전집터가 발견되고 있다. 이중 두 곳은 대나무 흔적도 확인된다. ‘중원이케 웃담’과 같이하는 지역이다.
한편, 가시왓케 옆 내(川) 서쪽 산 1번지 화전지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이 화전민은 동쪽 가시왓케 사람들과 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이며 주변 울담은 필지의 면적들이 커 방목을 하며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테우리를 했던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겠다. 이곳 서호동 화전민은 어디로 갔을까?
4·3사건으로 영남동이 불에 타자 많은 사람들이 한라산 숲속으로 피신을 했다. 『잃어버린마을을 찾아서』를 보면 영남동 피난민들은 어점이오름과 시오름 방향으로 피신을 했는데 이들이 피신했던 흔적들이 이 화전지역 인근에서 발견됐다. 필자가 찾아낸 것은 숟가락, 깨진 솥, 깨진 그릇 등이다. ‘등터진궤’에선 솥전(솥의 테두리) 파편, ‘서우창궤’에선 숟가락, 이름을 알 수 없는 궤에선 깨진 솥을 찾아 궤 안에 두고 나왔다.
지역민 오○○은 호근동 어른에게 들은 내용이라며 등터진궤와 관련, “이 궤를 토벌대가 발견하고 다짜고짜 수류탄을 이 궤 안으로 던져 궤 천정이 터져 나갔다”고 했다. 예전에 자신도 이 궤를 봤는데 함께한 일행 중 나이든 한 사람이 말하길 “여기는 섬짓(무서운)한 곳으로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이다”고 말해줬다는 것이다. 등터진궤의 그릇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치워졌고 파편인 솥전만 발견되고 있다. 만약 이 구술이 사실이라면 이 궤 안에선 사람이 숨진 것이 된다.
『제주 4.3유적2 (개정증보판)』p302엔 '(1949)2.22일: 시오름 토굴에 숨어있던 김두행(59,남). 김두칠(55,남). 문여옥(30,여). 김춘선(20,여). 김춘옥(17,여). 김순열(12,여). 김두칠의 딸(5,여) 등 일가족이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됨'이라는 내용이 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 「남원읍 화전민 이야기」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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