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선교하러 화전민이 된 사람, 후손은 돈 벌러 일본에 가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㊽] 생물도에 살았던 화전민 가계
서홍 호적초에 보이는 가구 수로는 1896년 34호 85명, 1897년 22호 75명, 1900년 7호 33명, 1905년 7호 34명 1907년 7호가 거주하고 있다. 서홍 호적초를 기반으로 당시 생물도화전에 거주했던 주민을 추적했다.
■ 3통 4호 진명송(秦明宋)
교생(양반) 진명송(秦明宋) 나이 61세/ 부 교생 대운(大雲:소길리))/ 처 ○씨 나이 61세/ 아들 교생 ○○ 나이 25세/ 처 김 씨 나이 22세/손자 나이 9살
필자가 진명송의 고향 소길리를 방문해 진 씨 집안을 찾았다. 주민 부○준(1938생)은 “진 씨 집안이 양자를 두 번 들였으나 후사가 없어 멸족했다”라고 증언했다.
호근동 진○문(1937생)은 본래 생물도 화전민 후손이다. 마을에서 쉐(牛)를 올릴 때 그는 시오름 동북쪽 자왈 지역까지 올렸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가 진명송의 후손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 4통 1호 강신락
오위장(五衛將) 강신락(康信洛) 나이 57세/ 부 통훈대부 영손(永孫(○진리))/ 조부 통훈대부 석대(錫大)/ 증조 ○위장군 인첨(仁沾)/ 외조 통정대부 오참창(吳參昌)/ 처 정부인 강 씨 나이 55세/ 모 숙부인 오 씨 나이 83세/ 아들 ○백 나이 18세/ 딸 13살/ 작은아들 ○백 나이 10세
서호동 오○길(1922생)은 “강 방장이란 사람이 생물도에 살다 그 후손이 자신의 앞집에 살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후손 강○삼은 “자신의 선대가 생물도에 살았으며 대정읍 일과리에서 생물도로 넘어 왔다”라고 했다. 자신의 선대에 대한 이름은 족보가 없어 확인을 할 수 없었다. 생물도 화전민 중에 방장으로 불릴만한 사람으로는 오위장의 직함을 가진 강신락이 유일하기에, 강○삼이 언급한 선대가 강신락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과리에서 생물도로 이주할 때는 선교(천주교 또는, 교인의 입장에서)하러 왔다고 하는데, 이는 증조부 때의 일이다. 부친 강○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돈 벌러 갔으며 이후 생물도 화전지에서 서호동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해방 이전에 서호동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4통 3호 고승진(高承晋)
청금(양반) 고승진(高承晋) 나이 43세/ 부 청금 장전리(明樂)/ 조부 청금 宗?/ 증조 청금 광복(光福)/ 외조부 청금 강득찬(姜得贊)/ 처 진 씨 나이 37세
고승진은 국세를 낼 때 주민들의 세금을 거두어 제주시까지 가서 납부를 했다고 전한다. 서당을 운영하면서 화전민의 이장(里長) 또는, 호장(戶長)의 역할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손 고○○은 부친도 생물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증조부 고승진이 구엄 혹은 신엄에서 이주한 후 생물도, 서치모르, 연제골 등 3개 화전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서당을 운영한 것으로 전한다. 가계도를 보니 애월읍 장전리에서 이주했음을 확인됐다. 부친 고○○-조부 고○원로 신미생이라 하니 1871생이 된다. 생물도에 살다 부친이 호근동으로 이사를 했고 할아버지 고○주가 9살 때 애월읍 장전리에서 생물도로 이주했다. 그해가 1880년이다. 즉, 고조부 시절에 9살인 고○주 할아버지를 데리고 생물도로 이주한 것이다.
생활은 목축, 화전, 메밀, 고구마 등을 재배했으며 물은 생물도 동쪽의 냇가물 외에도 마을 내 동쪽 작은 언덕이 있는 곳에서 나는 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4통 4호 진계춘(秦桂春)
청금(양반) 진계춘(秦桂春) 나이 37세(장전리)/ 부 청금 시호(時好)/ 조부 청금 ??/ 증조 교생 광윤(光允)/ 외조부 청금 강언여(姜彦與)/ 처 강 씨 31세/ 동생 청금 ??(족보에서 시보(時保)로 확인됨) 나이 25세/ 처 박 씨 23세/ 외 1명 51세
진시호가 장전리에 거주하던 시절에 마을의 장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해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진시호가 사건에 연루돼 다른 데로 이주했다. 진 씨 집안의 장전리 입촌 가계도는 진광윤-진종평-진시호(時好)와 진시보(時保)가 보인다. 4호의 화전 진계춘의 부친 진시호와 이름이 같다.
족보에 진시호(秦時好)는 1851생이며 직책은 조방장으로 출륙 후 미몰 불상이다. 진계춘(桂春:1873-1950)은 30세인 1903년에 호근리로 이주한 사실이 확인됐다. 아내는 강 씨며, 후손은 진영백(秦永伯 : 1891생), 진중관(秦重關 : 1919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계춘 집안은 장전리에서 생물도로 이주해 살다가 1903년 호근동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호근동 거주 후손은 진○홍-진○민이다.
후손에 따르면 할아버지 진○백 시절 서홍리 목장지를 사들여 우마를 키웠다고 한다. 생물도에선 메밀을 재배했다.
할아버지 진○백은 호근마을 반장을 했었는데 4·3시기에 반장 집에 마긴 반(班)의 도장을 관리하고 있었기에 서북청년단 경찰이 백지날인 하는 것으로 오해해 끌고 가 총살을 시켰다.
■청금 한석진(韓錫晉) 나이 33세(상귀리)/ 부 청금 한재신(韓在申)/ 조부 청금 한상용(韓尙龍)/ 증조 청금 한동원(韓東元)/ 외조부 청금 강봉한(姜鳳漢)/ 협거 이맹춘(李孟善) 나이 5/ 초가 2칸, 강수검(姜秀儉) 나이31세, 불명자 56세 초가 1칸
필자는 족보(1994년 간행)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석진 일가의 묘소지를 확인했다. 할아버지 동원(東元)은 ‘신산모르’에, 아버지 상용(尙用)은 상귀리 ‘음남밭(陰木田)’에 모셔져 있다. 거슬러 고조부 영(英)의 묘는 북촌리 ‘고수물’에, 증조부 경보(卿普)의 묘는 다호마을에 모셔져 있다. 내용을 종합하면 한석진 집안은 북촌-다호-상귀리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상용(尙用)의 자식은 여신(興信) ,재신(才信), 광신(光信)인데 유독 둘째 한재신의 가계도만 족보에서 빠져 없다. 족보 상으로는 부친 한재신은 한 씨 집안 세손 28세이다. 다만, 족보에 한재신의 아들 한석진은 이름이 안보이고 있어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 본다면 한석진은 다른 곳으로 이주한 후 연락이 단절되어서 족보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가 1896년이고 한석진이 33세이므로 일제 강점기 이후 그의 후손들은 서귀포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기후위기와 이로 인한 산림의 변화, 재정악화에 따른 왕권의 약화, 신분제 붕괴, 과다한 세금 징수 등 복합적인 요인이 맞물리며 영향을 미쳐 화전이 확산되다 갑오개혁을 전후하여 서서히 화전지를 떠나고 있음이 보인다. 1896년 호적초에서 이미 화전을 떠난 가구 2호로 발생하고 있고 호적초 제도가 사라진 1907년까지 지속적으로 화전 수가 줄어들고 있다.
갑오개혁 후 제주도 화전의 변화는 추후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개혁 이후 제주도 화전민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데, 영남동이나, 무등왓처럼 주변 화전민 일부를 흡수해 성장하는 마을도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화전민의 이주는 추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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