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울창한 치유의숲, 과거엔 화전민의 터전이었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㊾] 호근동 화전민

호근동의 상잣은 각수바위(각시바위) 뒤 ‘상여왓’을 지난다. 상잣에서 산록도로 너머 시오름 남쪽의 ‘치유의숲길’ 내 국림담(속칭 중원이켓담)까지는 ‘중원이케’라는 호근마을 공동목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이곳에 과거 화전민이 살았다.

지역민의 구술에 의하면 시오름 인근의 화전민에 대한 조사가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이뤄지긴 했으나 1970년대 초반 마을 사무소에 있던 이 화전 기록표가 당시 청년들이 필요가 없다면서 불 태워버렸다고 한다. 화전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 사라진 것이다.


▲ 치유의숲 사무실 뒤에 화전민이 살던 집터가 있다. 그 자리에 지금도 대나무가 자란다.(사진=한상봉)

필자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호근동에 화전이 살았다는 지역민의 구술을 들을 수 있었다.

저의 고조부가 이 곳 시민치유의 숲에서 살았었고 30여 명이 있었다.(2016.10.20일 치유의 숲센터  허○숙) 

치유의숲 안에는 중원이케 알켓담과 웃켓담이 있다. 알케담이 지나는 ‘치유의숲길’ 사무실 뒤로 과거 목장화전민이 살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 살던 화전민이 허 모 씨의 고모부로 추정된다. 사무실 뒤 알켓담을 붙여 돌담이란 안내 푯말이 있다. 이외 웃케담 북쪽 삼나무조림지에도 두 채의 화전민 가옥이 있었으며 주변으로는 화전 울담이 대나무와 함께 지금도 남아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 제주지형도에 화전 집터를 확인할 수 있어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화전들도 1929년 실시된 ‘국유임야 내 화전가옥처리’에 관한 시행령이 발표되며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공작물(산림지 구조물)의 처리에는 영림서 직원이 입회를 했다. 이 사항은 법무 관련부서에 보고되었다. 이는 토지조사사업 시 소유 지번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또는, 화전으로 몰래 추가로 들어 온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이뤄짐을 의미한다.(일제는 1928년 화전조사 건을, 1929년 화전가옥처리를 실시한다.) 이 시기 호근동에서도 화전등록을 않은 집들이 삶의 터전에서 퇴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지형도의 A는 치유의 숲 사무실 뒤편 화전터이고, B는 웃케담 뒤에 정비된 화전 집터이며, C는 숯을 굽는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화전집터 자리가 된다. 이곳 모두 어느 누가 살다 해안마을로 이주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 1918년에 작성한 지형도. 호근동 시오름 주변에 있던 화전가옥을 담고 있다.(조선총동부 제작)

A지역 인근의 속구린질은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속구린질의 인근으로 산전 울담들이 남아있고 지금은 ‘치유의숲길’ 조성에 따라 목책길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과거 화전민이 일군 산전은 화전 집에서 서남쪽 7시 방향에 남아있고 굵은 대나무(왕대)들도 보인다. (좌표 33°17'29.19"N,126°31'29.34"E)

A지역 화전은 B지역 화전과도 이어져 있음이 속구린질과 그 사이 산전 울담으로 확인되고 있다. B화전지에선 탐방 숲길을 조성하며 화전 집터를 새로이 복원하여 탐방객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길의 위와 아래에 집터 흔적이 남아 있다. (33°18'3.10"N//126°31'26.85"E)


▲ 엄부랑숲길에 복원된 화전민 생활터(사진=한상봉)


참고로 이 화전지역의 삼나무를 보면, 나무가 한 가지로 곧장 하늘로 자란 게 아니라 줄기가 두 세 가닥으로 나뉘어져 자란 것을 볼 수 있고, 부피도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알제강점기 화전민이 떠난 자리엔 화전터 서쪽으로 학교림이 조성됐다. 서귀국민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나무를 심었고, 비슷한 시기에 영림서에선 삼나무를 화전지역에 식재하였다. 해방 후 제주4·3을 지나며 집을 지을 용도로 목재 수요가 증가했다. 집을 잃은 중산간 사람들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잘랐는데, 당시 두 세 줄기로 나눠진 못생긴 나무들만 잘려나가질 않고 살아남았다. 그 결과 이것들이 지금처럼 부피가 큰 삼나무로 남을 수 있었다.


이 화전 지역에 누가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역에서 전하는 얘기가 있다. 서귀포시 강정동 용흥리 마을 오○자(1940생)의 증언이다.

고○백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고○열로 화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제주4·3 이전 서호동으로 내려온 후 부친과 결혼했고, 외할머니는 김 씨하고 시오름 동쪽에 살았죠. 저가 어릴 적에 외할머니가 말하길 ‘자신이 살았던 시오름에 가보자’고 해서 같이 갔었던 일이 있습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화전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외사촌 후손은 호근리 고○○입니다.

위 내용에 따라 고○○집으로가 확인해보니 조상 고○백이 화전에 살아서 지역민들은 지금도 화전집이라 부르고 있고, 숯을 구웠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숯가마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화전민이 살던 집의 돌담이 훼손됐다.(사진=한상봉)

C지역에도 화전이 살았던 흔적이 제주지형도에 보이고 있다. 이곳 지형은 뒤로 언덕이 있고 평지에 숯을 구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옛 집터를 허물어 돌숯가마를 만들어버려 산전 울담을 통해서 화전터의 일부나마 찾아낼 수 있었다. 이곳 좌표는 33°18'35.88"N//126°31'24.87"E에 해당된다.

이곳은 시오름 북쪽 표고장에서 3시 방향 730고지 부근으로 이곳 사람들도 아래쪽 ‘치유의숲길’ 화전민과 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항공사진에 하얀색으로 보여 이후 자왈지역(가시덤불지역)으로 변했다가, 지금처럼 나무가 자라 숲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호근동 고○○(1940생)의 구술에 의하면 가시덤불이던 자왈지역엔 쉐들을 풀어 방목도 했다고 한다. ‘한라산둘레길’과는 동남향으로 31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시오름 동쪽 역시 산전 울담들이 많이 남아있다.


▲ 화전민이 일구던 산전(사진=한상봉)

이외 시오름 동남쪽기슭에도 작은 산전이 형성되어 있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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