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제주의 모습들제주도는 동서 사면보다 남북 사면이 훨씬 가파르다.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남북 사면은 깊은 골짜기와 독특한 계곡을 만들어 낸다. 특히 서귀포시는 계곡에서 흘러내려 만들어 낸 수직 폭포들이 많다. 이 폭포들은 지형적으로나 경관적으로나 독특하고 종
시인 최영미가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에 던진 한 구절 ‘아아 컴-퓨-터와 x할 수만 있다면!’은 당시로서 엄청난 도발이었다. 그는 〈personal computer〉라는 시에서 컴퓨터가 유감스런 과거를 깨끗이 지워주고, 필요할 때 늘 곁에서
서귀포시 하효동은 감귤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1년에 눈이 쌓이는 날이 하루도 되지 않은 정도로 온화한 날씨 덕에 맛있는 귤을 생산하는 마을로 명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은 관광명소 쇠소깍으로 더 유명해졌다. 쇠소깍 천연비경과 수상레저가 알려지면서 많은 여행
세상이 어지럽고상념 끊이지 않아신들의 자궁송당 당오름에 올랐다.이글거리는 열정과 욕망에금백조와 소천국은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 낳고잘도 키웠다.등반로 주변모든 나뭇잎들이흐린 하늘과 햇빛 한 조작을입에 물고 있다.PHOTO BY 양희라
과거에 소중했던 샘물, 점차 찾는 이 없어지고오름 이름만 보아도 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최근까지 물을 이용하였다는 흔적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밖에서 바라본 수악(사
1914년 지적원도를 보면, 영남동 서치모르에는 웃마을에 28호가 살았고, 아랫마을에는 모두 14호가 확인된다. 영남동에 살았던 몇 개 집안을 추적했는데, 앞선 기사에서 강임준, 이보겸 집안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러 집안을 추가로 소개한다.▲ 1899년 제작된 제주군읍
가슴에 맺힌 한이그리도 많아아우성치던 용암대지에 남긴 거친 생채기어느 용감한 씨앗 한 알깨진 돌 틈에 파고들더니더께 진 시간 위에마침내 신성한 숲, 저지곶자왈대지의 뜨거웠던 기억과서늘한 공기를 비벼제주백서향 숨을 쉴 때난 그윽한 향기에 취한다.PHOTO BY 양희라
오름은 하나인데 3개의 마을을 둘렀다제주도에 여러 오름이 있다. 그 많은 오름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오르려면 세 개(예래동, 창천리, 대평리) 마을을 통해서 오를 수 있다. 그 마을마다 이곳은 자랑거리가 된다. 또 자동차로 정상 가까이 올
영남동에 언제 마을 형성됐는지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방성칠의 난과 관련해 강제평이 종신형을 선고받았음이 대정읍지에 보인다. 그는 농민군 선군령(先軍領)이었고 직업은 농민이었다.영남동 마을은 두 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영남동 282번지를 중심으로 한 웃마을, 다른
일찍이 청년 김영갑은현몰(顯沒)하는 아름다움을 찾아1950년대 빨지산처럼구좌 땅 오름과 오름을 헤맸다.둔지봉 오르는 날해송과 억새, 바람봄 내음 빚어이젠 나를 반긴다.눈앞에 파도치는 바다구름 낀 들녘과 오름병풍여기 우리 말고영등할망도 왔구나PHOTO BY 양희라
톳보말칼국수를 기대했는데, 톳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톳은 가루 반죽에 다 들어 있다. 몸에 좋은 톳을 품은 면과, 보말육수의 진한 맛이 어우러져 없던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중문초등학교 교차로는 중문에서 가장 번잡한 한 곳이다. 주변에 서귀포국민체육센터와 서부도
오르기 전부터 위엄과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오름368개의 오름 중에서 특별한 오름이 있다. 형태나 그 오름을 형성하는 지질의 특별함이다. 바위산이라고 오르는 이곳은 어쩌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아주 오래전 물과 뜨거운 용암이 만나 분출한 화산쇄설물들이 오랜 기간
영남동 산록도로 위쪽 약 1km 쯤에 코뻬기마을이 있었는데, 거기에 김 씨와 이 씨 집안이 살고 있었다. 김 씨 집안사람 중에는 법정사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 김두삼(당시25세)도 포함됐다.그리고 또다른 김 씨 집안이 있었다. 용흥리 김인수(1934생)의 족보
서귀포시 영남동은 과거 화전민이 살던 마을이며, 주변에 판관화전과 코빼기화전을 위성화전으로 거느리고 있었다는 걸 앞서 기사에서 기술했다. 1880년대 중반에 김 씨 일가가 판관화전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1910년 중반 이전에 영남동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영남동으로
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추위가 몰려왔다. 지구온난화로 북국 제트기류에서 빠져나온 찬 기단에 한반도 주변에 몰려와서 생기는 현상이라는데, 방심하다가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다시 두꺼운 옷을 꺼내고, 땔감을 챙겼다. 2월에 들어 회식 때마다 고기를 먹은 터라,